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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부·2023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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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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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을 시작하게 된 계기

어릴 때부터 나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내 적성이 무엇일까? 스스로 되물으며 학창 시절을 보내던 와중 베트남에 가게되었다.

베트남은 과거 냉전 시기의 숱한 전쟁들로 인해 현재 베트남은 한국과 상반되게 노령인구는 적으며, 개발도상국으로서 낮은 물가와 고출산율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구수는 한국보다 높다. 그리고 베트남이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기에 이 나라에 나의 장래, 미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유학을 결심하였다.

이후 나는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나서 본격적으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 날씨는 너무 덥고 당시 나는 비만 체질이라 땀도 많이 나서 입국할 당시 가져왔던 옷이 전부 해져있었다

그래서 시원한 새 옷을 장만해야 할 상황을 자주 마주했다. 그러나 나는 옷을 항상 부모님이 사주셨으며 당연히 나는 단벌 신사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타일에 대해서는 안목도 없고 문외한이기에 결국 매장에 진열된 마네킹 차림새로만 구매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베트남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게 되자 문득 여러 분야를 탐구하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베트남도 한국처럼 무신사와 같은 플랫폼 앱이 있을까 하여 호기심에 찾아보았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의류, 음식, 편의용품 등 관련된 서비스 플랫폼이 없었다.

이것에 대하여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내가 직접 베트남에 양질의 소셜커머스를 안착시키는 게 어떨지 생각하고 계획을 구상해 보았다.

때마침 한국의 여러 기업이 베트남으로 들어와 각종 플랫폼에 대한 투자와 수주를 하였으나, 한국과 베트남의 홍보관은 서로 동일하나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기에 한국 플랫폼의 전반적인 마케팅, 예산, 인허가 등 결렬이 되며 현지화도 난항을 겪은 거로 보였다.
하나둘씩 한국으로 철수하는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나에게 있어서 이 상황을 호재라 생각하여 베트남 정서에 대해 계속된 탐구를 하고 베트남 친구들을 사귀고 베트남어를 유창히 구사하도록 연마에 집중을 가 했다.

이후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 판단하여 베트남에서 내가 생각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실질적인 사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다

게이머의 강국은 대한민국 아니었는가 어느 날 친구가 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해외의 게임유저가 한국 온라인게임 유저와 친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기획안을 필두로 사업을 시작하려 하는 친구가 개발을 배운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개발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결국 모 개발 업체에 외주를 주는 형식으로 앱을 개발 후 출시하였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3,000만 원이라는 고액의 개발비용과 더불어 유지보수 문제도 개발업체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여 사후 관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일반인이 플랫폼 관련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선 자본도 자본이지만, 개발자가 웹사이트, 앱을 제작하고 유지보수까지 겸임하는 운영을 하는데 공교롭게 갑을 관계가 교체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기에

이 대목에서 나의 상황에 최대한 안정적인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일단 웹 혹은 앱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구상하고 있던 와중에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의무를 임하여 입대해야 할 필연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는가? 엎치는데 덮치는 격 병무청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한국으로 귀국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였다.

한국으로 귀국한 나는 사회복무요원으로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배정되어 공익근무 생활을 시작했다.

공익근무 생활을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았다. 이 상황을 기회라 여겼던 나로선 프로그래밍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고 마땅히 공부 방법을 몰랐던 나는 일단 무언가를 시도해 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초등학교 때 고액으로 매크로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게임 내에서 빠른 성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워했던 지난날이 떠올랐고 '한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매크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일단 도전 정신에 이끌려 노트북을 켜고 앉아보니 어떻게 하는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유튜브라는 훌륭한 플랫폼이 있지 않은가? 영상을 찾아가며 시행착오를 겪어보니 원하던 매크로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엄청난 성취감이었다.

무언가를 이렇게 노력해가며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해 잊고 살았던 나에게 이렇게 개발은 나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배경지식이 없어 매크로를 만들어도 다른 정보와 응용할 방법을 몰라서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까?'와 정보를 찾아보아도 항상 끝은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쳤다.

나는 영어를 공부하지 않으면 `정보의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어렵겠다' 라는 생각들이 몰아쳐 왜 친구가 프로그래밍을 포기한 이유를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욱더 성장하고 싶었다. 영어도 개발도 부딫이면서 배우면 되는 일 아닌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내 꿈을 포기하긴 싫었고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또 다른 걸 만들어 보자 하였고, 여러 가지 투자자산에 관심이 있던 나는 가상화폐나 주식의 HTS 프로그램을 응용한 자동 매매 봇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했다.

우당탕퉁탕 갖은 시행착오 끝에 생각했던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지만, 원인 모를 설정 오류 덕분에 나의 소중한 젊은 날의 공익월급 200만 원은 마법처럼 3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문제를 찾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러 책을 구매해 공부를 프로그램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머리를 싸매며 검찰청 휴게실에서 코딩 공부를 하던 와중 IT 특별공채로 입사하신 계장님이 나를 발견하고 뚝딱 내가 모르던 코드를 한순간 해결해 주시며 개발이 배우고 싶냐고 하며 배우고 싶으면 C언어 교재 사서 공부하라는 조언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로드맵을 그려주셨다.

하지만 C언어는 독학으로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언어였다. C언어의 어려움과 난해함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지속해서 딜레마에 빠지던 나는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소집해제 후 다시 베트남에 가서 복학해서 한국에서 베트남 전문가가 될 생각에 다시 베트남에 대해 공부를 하며 준비를 하다보니 어느새 소집해제 날짜가 되었다.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3개월 동안 마지막으로 친구들하고 추억을 만들던 중에 친한 동생이 컴퓨터 공부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코딩에 애증의 미련을 가지고 있던 나는 친한 동생과 같이하면 재밌게 서로 동기부여 하며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같이 열심히 공부할 장소를 찾아보던 와중에 wecode를 알게 되었고, wecode에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코딩의 A부터 Z까지 웹 개발을 배우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한 나의 개발자 라이프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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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로 다하고 싶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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