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 유독 걸출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도 뛰어난 음악가가 있었겠지만, 독일어권만큼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는 클래식의 본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음악과 연관이 깊다.
이렇게 특정 지역에서만 클래식이 발전하게 된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시간에는 여기에 어떤 역사적인 이유가 숨어있는지 알아보자!
🔉 이 글에서 서술하는 내용들은 " 고흐? 바흐?🤔 왜 독일은 음악가가 많고 네덜란드는 화가가 많은지 궁금했던 사람 손!!!🙋♂️🙋♀️ "의 영상 내용과 필자가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
이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종교 개혁은 예술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1517년 비텐베르크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를 반박하면 시작됐다.
- 교황은 왜 면죄부를 판매했을까?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금 충당이 필요해져서 면죄부를 판매하게 됐다.
- 성 베드로 성당?
첫번째 교황이자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인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서기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시로 건설된 4세기 성당이 첫번째 성당이며, 이후 1506~1626년까지 120년간 성당을 재건축한다.
문제는 재건축에 너무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레오 10세 조차도 그 건축비를 다 대지 못했다. 결국 자금 충당 수단의 하나로 면죄부를 팔게 됐다.
당시 카톨릭 신부들은 할당된 면죄부 판매 실적을 채우면, 나머지 판매 수익은 그들 몫이였다. 그래서 이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면죄부 판매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작센의 선제후는 자신의 영지에서 면죄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확신이 없던 작센 사람들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를 찾아가 대답을 요구했다.
- 마르틴 루터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를 사지 말라!
"라고 답했다. 그리고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자기의 의견을 쓴 95개 조의 의견서를 써서 비텐베르크성에 붙였다.
- 95개 반박문이 게시된 비텐베르그 교회 문
이때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루터를 지지하는 반항하는 사람들 '프로테스탄드 개신교'가 생기게 되면서 유럽은 카톨릭과 개신교 세력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를 여러 번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먼저 종교개혁을 시도한 보헤미아의 얀 후스 같은 인물은 (대립)교황 요한 23세에게 소환당해서 1415년 화형을 당했다.
- 얀 후스 (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그렇지만 독일의 제후들이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루터를 보호했기 때문에, 루터 암살에 번번히 실패했다.
오래 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십일조를 바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교회에 내는 헌금 이외에,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야했다. 자신의 수입의 10%를 바친다는 것은 짜증났을 것이다.
지리적 위치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교황이 로마에 있고 지리적으로 로마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독일어권은 이미 언어와 민족이 다르고 교황령과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굳이 교황에게 복속될 이유가 없었다.
추락한 교황의 권위
당시 교황의 아비뇽 유수 사건, 대립 교황 등으로 이미 교황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져 있었다.
독일인의 민족성
독일이라는 국가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는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철학"도 그 중 하나이다.
(니체,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헤겔 등등)
이들은 진지한 사람들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교황이 계속 잘못을 하고 있는데, 그 잘못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독일 사람들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가지 경제적, 정치적, 신앙적인 이유로 독일어권은 교황에게 이탈하려고 간을 보고 있었는데, 그 불씨를 마르틴 루터가 던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럽은 빠르게 개신교 유럽과 카톨릭 유럽으로 나뉘어지게 됐다.
백성들 모두가 카톨릭을 믿을 때는 교황이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변 영주들이 합법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카톨릭을 믿는 백성들은 카톨릭의 대장인 교황이 인정하기 않는 왕을 따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왕이 정통성을 갖고 귀족과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인정이 필요했고, 로마 카톨릭에 순종해야 했다.
마르틴 루터는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쓰려고 한 것 자체가 교회의 부패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성당의 건물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짓거나, 성당 안을 성상과 성화로 장식하는 것을 부패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개신교는 성상과 성화로 예배당을 장식하는 것을 금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 그런데 성당 안을 왜 그렇게 화려하게 장식했을까? 수많은 스테인글라스, 성화 그리고 화려한 건물을 성당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일반인들이 주일에 예배당 안에 들어갔을 때,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평민들의 삶은 헐벗고 굶주림의 일상이었고, 이런 평민들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지옥같은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천국의 맛을 느끼게 해줄 수 있던 장소가 성당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예술품 장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을 교회의 신성함을 부여함과 동시에 헌금을 원활하게 걷는데도 도움이 됐다.
개신교는 미술품과 건축 양식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것을 금했으니, 그 미술이 들어갔던 자리에 "음악"을 채워넣는다.
그래서 많은 찬송가, 칸타타 이런 것들이 이 당시 작곡되었다.
기악의 기본 형식 : 소나타
성악의 기본 형식 : 칸타타
이렇게 성화를 그릴 수 없게 되면서, 독일어권에서는 화가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어권의 주도적인 예술은 미술이 아니라 음악이 차지하게 된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많은 사건들이 얽혀 있다. 그래서 예술사를 언급하는데 국제정치사를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한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 상황과 다양한 배경지식이 필요한만큼 어느 선까지 얼마나 깊게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이 글을 쓸 때, 최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춰서 작성했고, 그 외 배경지식은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