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시 가장 고려해야 할 것

Felix Yi·2020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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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을 고려한다는 말을 하니, 같이 근무하시는 분이 최근 100억 이상 투자받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여기저기 일을 하고 있는데 100억 미만 투자받은 곳에 들어가면 아주 힘들다고 말을 했다. (구체적으로는 인건비를 못 받는 경우를 많이 만난다고 함)

그분은 경력 15년 넘은 서버 개발자인데 농도 치면서 재미있게 말을 하면서 중요한 팁은 잘 던져주는 분이다. 아주 오래 일을 했지만 유머를 간직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훈계하지 않고 슬쩍 던져주는 행동을 하려는 사람을 보며 아 이런 거 참 좋네 느꼈다. 애니웨이!

나 또한 동의하고 선택한다

워렌버핏은 회사를 소유한다는 생각으로 주식을 매입하라고 했다. 몇군데 면접을 보다보니 그말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말이 서로를 어떤 관계로 대할 지, 알고 관계를 맺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선택은 대상과 관계의 틀을 정한다.
즉,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지, 내가 나 자신을 어떤 관계속에 놓을 지, 내가 정하는 것이다.

보통 1회용품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기는 유지되고 1회 용품만 쓰고 버려진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1회용품 입장에서도 사용자는 1회성 만남일 뿐이다.

내 입장에서야 '너'를 한 번 밖에 보지 않지만, '너'의 입장에서도 나는 한 번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다.

from 내 기억 속

돌아와서,

즉, 어떤 회사가 나를 당장 빨리 급하게 코드를 치울 요량으로 뽑으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대해질 것이고, 이 선택은 회사도 하지만 나도 동의하고 하는 것.

좋은 선택은 내가 원하는 게 명확할 때 찾아온다

상담장면에서 보면, 뭐라뭐라 내담자가 말을 하면 상담가가 '그럼 00님은 뭐가 어떻게 하고 싶으셨어요'라고 말을 한다. 어떤 내담자는 그냥 내 피해자 정체성에 대한 당연한 경청과 위로를 생각하고만 있었기 때문에 당황을 한다. 심지어 화까지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 질문은 피해자 말고, 다른 정체성에 대한, 즉 또다른 나의 존재를 열어두는 질문이다. (경청을 하지 말고 돌직구 던지라는 게 아님)

"그럼 당신은 지금의 당신말고 어떤 당신이 되고 싶나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느낌을 다시 만나면 지금은 잊혀진 '선택하는 나'의 삶을 다시 찾게 된다. 즉,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슬픔도 앞으로의 삶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질문.

관계를 맺는 -여기서는 직장을 선택하는 일-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면 내가 어떻게 대해질 지 선택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선택에 대한 후회도,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 내렸을 때의 대처도 한결 수월해진다.

그럼 내가 원하는 건 뭐죠?

난 이렇게 많이 아는 똑똑이인데 왜 나의 모르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모른다는 것을 알면, 탐구하면 된다. 그러나 탐구의 방향이 엉뚱하다면 모르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다.

부정할 수 없는 발화자 '나'

인터넷에서 가치투자 관점을 찾아보면 다음 내용이 나온다.

독점력과 비즈니스 모델 등 무형의 가치

  • 10 년 후에도 존재할 아이템인가?
  • 확고한 시장지배역이나 독점력을 가지고 있는가?
  • 제품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가?
  • 우리 주변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기업인가?
  • 반복구매되는 제품을 만드는가?

http://www.itooza.com/common/iview.php?no=0000000000000000127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발화자는 돈이 돈을 벌게 하고 싶은데 자신은 그 일에 힘을 덜 쓰고, 나보다 더 열심이고 전문인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일을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가치 투자자라는 사람들은 실제로 저런 행위를 자주 하고, 그 행위를 하는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며 만족감을 느낀다.

발화의 내용은 언제든 사실을 가리키지 않을 수 있지만 발화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자체다.

즉, 내가 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 지, 그리고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 좋은 느낌을 받는 지. 한번쯤 정리를 해본다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금 '나'의 삶의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자면, 타자에게 빚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돈 흐름을 보면, 여유자금을 빚을 갚는 것보다 비상금으로 저축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돈 수치를 자주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어떤이의 예

발화 : 빚 이야기를 하면서 빚에 고통받는 나, 빚 없으면 살것같은 나.
행위 : 변동성에 대비해 저축, 저축액 자주 확인하며 안심.
발화자 : 큰 돈이 들어갈 일이 갑자기 생길까봐 일상적으로 두려워하는 나. 빚은 계속 갚고 있으므로 관리 가능한 영역이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거나 적다.

부정할 수 없는, 실존하는 어떤 '나'를 찾았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무지에 대해 반응(react)할까? 응답(response)할까?

즉각적인 반응은 상대에게 관심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아무 생각없이 인사를 하고 아무 생각없이 비난을 한다.

저사람 왜 저럴까? 물어보고 기다리고 그의 느낌과 필요를 내것처럼 알아가는 응답(response)보다는 아이고 니가 00해서 그래라며 조건반사적인 반응(react)을 한다.

이건 참 편리해서,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다. 두려움에 휩쌓인 나에게 왜 그렇게 두려워 하냐고 말을 해보라고 시간을 내어주기 보다는, 사회로부터 주입된 '만능 돈설'을 즉각 꺼내며 두려움을 밀쳐내 버린다.

두렵다고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그냥 누구라도 할법한 기계적인 응답을 하며 신경을 안 쓰고 외면하려하는 상황. 그 불안과 실망은 더 더 커져만 간다.

결국, 위에서 언금한 어떤이에게는 '응답'이 필요하다. 그의 두려움에 대해서, 빚을 갚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고도 저축까지 할 수 있는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데도 어째서 그렇게 두려워 하는 거냐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 될거라' 믿고 자신이 어떤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는데, 정말로 통장에 쌓인 비상금이 늘어나는 만큼 '모른다'가 해소되어 '안다'로 바뀌고 있는 지.
(두려운데 잠시 위안을 느껴는 건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고, 모르는데 잠시 위안을 느끼며 모름을 잊었다고 해도 여전히 모르는 것.)

'모르는 것'을 알기위해 자신의 두려움에 응답(response)해주길 바라는 이가 '야 이거 하나면 되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며 무시당하는 느낌을 알고 있냐고, 그게 지금 자신이라면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나는 나(세상)를 모른다

상담가는 내담자의 삶에 정답을 제사하지 않는다. 재회를 하게 해준다며 상황-해결 식으로 전략을 짜주는 유사 상담이나 코칭은 상담으로 치지 않는 주요한 이유다.

다만, 상담가는 내담자가 자신을 다양한 관점에서 깊이 탐구하고 그결과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돈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것을 인간(나)의 본질(essence)로 취급하고 있는 그는, 그 본질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existence)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기회가 없다.

저축액이 떨어지면 죽고, 저축액 없이 버든 돈을 족족 빚 상황하는데 써야만 한다면, 그런 사람의 삶은 그에게 '죽음' 그 자체. 공포 그 자체다. 그래도 삶을 살아가고 그래도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며 살려는 사람이 눈 앞에 존재해도, 그는 '자기 기만이야'라며 그를 무시해버릴 것이다.

몰라서 두려우면, 살면서 알아가면 된다. 그는 단지 탐구하고 싶을 뿐이다.

구약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는 본질 바깥의 실존하는 자신을 탐구했다. 그 결과로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신약을 통해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 왜 성경이 신약까지 한 패키지일까. 신이 왜 본질 바깥에 나간, 실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을 준 것일까?

"정말로 내가 두렵고 모른다는 사실에 동의하신다면, 그것을 알아가는데 지금 저축하고 있는 자원을 사용하실 마음이 있나요?"

그는 탐구할 수 있다. 저축한 자원으로 시간을 벌고, 자기 탐구의 결과로 부모와의 관계, 자신의 건강, 스킬 쌓기 등등의 '모름'을 탐구해가며 알아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을 방치하지 않게 시간을 내고, 마음을 쓰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 모른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 그것을 삶으로 피워내는 것. 어떤 결과가 나오든 살아보는 것.

이직 시 내가 가장 고려해야할 것, 나

좋은 선택은 안전빵인 회사를 고르는 것도,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그냥 아무 회사를 고르는 것도 아니다.

합리라고 이름이 붙여졌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저 앵무새처럼 다시 말하는 내용을 무조건 들이 밀면서 두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저, 이직을 앞두고 너무나 두려운 나 자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쾌시 시간을 내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가 끝나도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을 알려주는 것 뿐이다.

내가 나와 어떤 관계를 맺을 지, 나를 어떻게 대할 선택을 내리는 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이직 시에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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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구와도 같은 시장 육체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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