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가이버·2025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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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처드 파인만

리처드 파인만: 유대인 가정이었지만, 아버지는 무신론자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토요일마다 예배당에 보내셨고 또 유대인 주일학교에 보내서 히브리어 등을 배우게 하셨어요. 하지만 전 열세 살쯤 그만두었습니다. 그런 걸 믿지 않았기에 무신론자가 되었어요.

제 종교적 입장은 저의 과학 지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물리적 세계에 대해 배웠다고 해서 어떤 종교적 견해가 틀렸다고 곧바로 알아낸 게 아니니까. 하지만 둘 사이에는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란 이런 겁니다.

저와 관련이 있었던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들은 창조주와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연결이 있고, 특히 기독교에는 지구에 내려오는 전령이 있어요. 그 전령들은 인간사에 무척 관심이 많지요. 하지만 우주가 너무나 방대하며, 사람이 없던 시간이 무진장 길었으며, 인간이 없는 우주의 영역이 그렇게나 크며, 별들이 너무나 많고, 자연이 매우 정교하다는 걸 알면 알수록 인간은 광대한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무대가 너무나 크고 드라마는 너무나 멋지기에, 저는 신이 이 작은 구석에만 시간을 쏟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저는 인간이 이 특정한 시점까지 진화해온 동물이라고 봅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건 참으로 놀라운 불가사의이고, 또 비슷한 다른 질문들도 있는데, 저로서는 답은 몰라도 계속 탐구해보고 싶은 불가사의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주와 인간 사이에 만들어진 그 특별한 이야기들을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지역적이니까요. “주님이 지구에 오셨다.” 즉 신의 여러 측면들 중 하나가 지구에 내려와서 세상을 바라봤다는 건데, 왜 하필 지구에만? 어쨌든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의 과학적 견해가 내 믿음과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떤 것이 참인지를 어떻게 아느냐라는 질문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야기들이 저마다 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니, 여러분은 의아해지기 시작합니다. “과학도 참입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어요. 저는 이렇게 말해요. “아뇨. 우린 뭐가 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알아내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을 “모든 게 틀릴 수도 있으니, 알아봅시다.”라는 관점으로 한 번 바라보세요. 그러면 곧 서서히 빠져나오게 되고 다시 돌아가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견해나) 저의 견해, 즉 뭐가 참이고 거짓인지를 알아봐야 한다는…. 일단 그런 식으로 한 번 의문을 갖게 되면, 그건 제 영혼의 매우 근본적인 한 부분인데, 종교를 믿기는 조금 힘들어집니다.

마빈 민스키: 파인만과 저는 불가사의한 것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불가사의는 그걸 풀 수 있기 때문에 경이로운 거예요. 가령, 엄청난 불가사의를 하나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젠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데 파인만과 저는 생각이 같았습니다. 마음은 두뇌가 하는 일입니다. 두뇌는 500만 년 동안 진화해온 컴퓨터지요. 경이로운 자연현상이기에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이 영혼이나 정신 또는 그 비슷한 거로 작동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사실, 내 견해는 영혼이나 정신의 개념은 모욕적이고 모멸적인 뭔가가 있어요. 동물들을 보세요. 4억 년 전에는 물고기들이 있었습니다. 수십억의 물고기들이 다윈의 진화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죽어갔어요. 그다음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포유류가 나왔죠. 인간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노력이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런 동물의 고군분투가 전체 회로에서 작은 변화들을 발전시켜 왔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 인간이 있고, 3만 개 이상의 유전자가 작용하여 가장 복잡한 기관인 두뇌를 이루었지요. 그게 단지 영혼이라고 정신이라고 아무 구조도 없는 어떤 무형적인 것이라고 창조주의 선물이라고 말해버리면, 그건 모욕적인 거라고요! 우리의 모든 동물 선조들의 희생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짓입니다.

리처드 파인만 | 크리스토퍼 사이크스, 노태복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73004451

2.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신(Dieux)』

딥시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Dieux)』은 202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개미』 시리즈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인류의 기원, 종교, 신화, 그리고 과학을 융합한 독특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신』의 주요 줄거리와 테마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주요 줄거리:

  1. 미스터리한 발견:
    소설은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에서 신비로운 유적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 유적은 인류의 기원과 신화적 존재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 발견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종교적 믿음의 근원을 탐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 신과 인간의 관계:
    베르베르는 신화적 존재들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는지, 아니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3.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정:
    이야기는 고대 문명부터 현대,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배경을 넘나듭니다. 등장인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인류의 운명과 신적 존재들의 목적을 탐구합니다.

  4. 과학과 신화의 융합:
    베르베르는 과학적 이론과 신화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합니다. 양자역학, 우주론, 고대 신화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5. 인류의 운명:
    소설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운명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신적 존재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류의 미래와 진화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주요 테마:

  • 인류의 기원과 진화: 신화와 과학을 통해 인류의 기원을 탐구합니다.
  • 종교와 과학의 경계: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탐구의 관계를 재조명합니다.
  • 시간과 공간의 초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개념을 확장합니다.
  • 철학적 질문: 인간의 존재 의미와 운명에 대한 깊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은 독자들에게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신화와 과학, 철학을 융합한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입니다.

챗지피티: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신(Dieux)』 시리즈는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과 연결되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소설입니다.


📖 작품 개요

  •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
  • 출간: 2004~2007년 (총3권/한국 6권 시리즈)
  • 장르: 철학적 판타지, SF

이야기는 『천사들의 제국』에서 이어지며,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이번에는 신 후보생으로서 새로운 시험을 받는 과정이 중심이 됩니다.


📌 주요 내용 요약

1️⃣ 신 후보생이 된 미카엘

  • 주인공 미카엘 팽송은 천사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 신 후보생이 됩니다.
  • 그는 신학교에서 다른 후보생들과 함께 자신만의 세계(문명)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실험을 수행해야 합니다.
  • 신학교에는 다양한 신화 속 신들이 교수로 등장하며, 그들로부터 신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2️⃣ 문명 실험과 경쟁

  • 미카엘은 자신이 만든 인류 문명을 지도하고 발전시키려 하지만, 다른 후보생들도 경쟁적으로 문명을 만들어 서로 대립합니다.
  • 인간들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신 후보생들은 인간을 조종할 것인지, 자유를 줄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3️⃣ 신의 역할과 한계

  • 미카엘은 신이란 단순히 강력한 존재가 아니라, 책임을 지고 도덕적 결정을 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 하지만 신 후보생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혼란이 발생하고, 결국 거대한 충돌이 벌어집니다.

4️⃣ 결말과 메시지

  • 마지막에는 신의 존재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게 철학적인 고민을 남깁니다.
  •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인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인지에 대한 역설적인 주제도 다룹니다.

🧐 주요 주제

🔹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지, 신이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탐구함.
🔹 자유 의지 vs. 운명: 인간에게 운명을 결정해주는 것이 더 나은지, 자유롭게 두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이 나타남.
🔹 문명과 신의 개입: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신은 인간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짐.

"신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요약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은 그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로,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에 이어지는 영계 탐사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이 작품은 인간, 천사, 신이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탐구하며, 철학, 신화, 과학, 상상력을 결합한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한다. 소설은 총 3부(한국어판 기준)로 구성되며, 주인공 미카엘 팽송(Michaël Pinson)의 여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야기는 미카엘이 인간으로서 죽음을 경험하고(<타나토노트>), 천사로서 임무를 수행한(<천사들의 제국>) 후, 신 후보생으로서 신들의 도시 '올림피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올림피아에서는 144명의 신 후보생들이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12신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Y 게임'이라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자신만의 인간 종족을 창조하고 문명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후보생들은 경쟁하며 신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해야 한다. 미카엘은 돌고래족을 선택해 문명을 이끌어 나가지만, 점차 신들의 윤리적 결함과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급전개와 반전을 거듭하며, 우주의 근원과 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미카엘은 우주의 끝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읽고 있는 책(<신>)의 페이지 너머를 마주한다는 메타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는 베르베르 특유의 철학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살신자 뤼시엥 디프네(Lucien Duprès)에 대해

뤼시엥 디프네는 <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미카엘 팽송의 동료 신 후보생이다. 그는 '살신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소설 내에서 강렬한 개성과 독특한 행동으로 주목받는다.

주인공 미카엘 팽송은 사후에 신이 되기 위한 후보자로 선발되어, 올림푸스라는 신들의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다. 그는 다른 신 후보들과 경쟁하며 자신만의 신앙을 구축하고, 인간 세계에서 숭배를 받기 위해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들의 세계 역시 인간처럼 질투, 음모, 배신이 난무하는 곳임을 알게 된다.

미카엘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 점차 강력한 존재가 되어가지만, 동시에 신이라는 존재 자체의 의미와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신들의 체계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하지만, 올림푸스를 지배하는 권력 구조와 맞서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주요 주제:

  • 신과 인간의 관계
  • 종교와 믿음의 본질
  • 권력과 윤리
  • 죽음 이후의 삶과 신화

살신자(殺神者) 뤼시엥 디프네는 누구를 모델로 했나?
소설 속에서 살신자(殺神者, Dieucide) 뤼시엥 디프네는 신들을 처단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신들의 권력과 위선을 비판하며 그들을 타도하는 데 집착한다.

뤼시엥 디프네는 역사적으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 중심의 철학을 제시했다. 뤼시엥 디프네 역시 신들의 세계에서 신을 죽이는 역할을 하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적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또한, 뤼시엥 디프네는 프로메테우스적 반항 정신을 상징할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 도전하여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이, 뤼시엥은 신들의 지배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

결론적으로, 뤼시엥 디프네는 니체의 철학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결합한 캐릭터로 볼 수 있으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신적 권위의 해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신>의 줄거리와 미카엘의 여정

<신>은 미카엘이 인간(<타나토노트>), 천사(<천사들의 제국>)를 거쳐 신 후보생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다룬 3부작의 완결편입니다. 미카엘은 Y 게임에서 돌고래족을 창조하고 문명을 이끌며, 신들의 도시 올림피아에서 경쟁과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소설은 방대한 상상력과 철학적 질문을 통해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탐구합니다.

결말에서 미카엘은 우주의 끝에 도달하고, 자신이 읽고 있는 책(<신>)의 페이지 너머를 마주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신과 같은가"라는 질문에 "독자"라는 답을 찾는 장면은 단순한 반전을 넘어 독자와 작가, 창조와 피조물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메타픽션적 전환점입니다.


"독자"라는 답의 의미

미카엘이 "신과 같은 것은 독자"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몇 가지 층위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창조의 주체로서의 독자:
소설 속 신들은 자신만의 문명을 창조하고 통제하지만, 그 세계는 결국 베르베르라는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작가의 창작물은 독자가 읽음으로써 완성됩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의 해석으로 이야기를 재창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신과 같은 권능—즉,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힘—을 갖습니다.

  1. 메타픽션적 깨달음:
    미카엘이 책의 페이지 너머를 본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임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이 자각은 독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너(독자)가 나를 창조한 신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독자가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미카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2. 철학적 질문의 종착지:
    "무엇이 신과 같은가"라는 질문은 소설 내내 미카엘을 이끄는 동력입니다. 신들의 불완전함과 우주의 끝없는 순환을 목격한 그는, 궁극적 창조자(신)가 외부에 있지 않고 독자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신의 개념을 초월적 존재에서 인간의 상상력과 인식으로 옮겨놓는 전복적 발상입니다.


<신>에 대한 제 생각

<신>은 베르베르의 상상력과 철학이 집대성된 작품으로, 몇 가지 측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 상상력의 경이로움:
    돌고래족, 상어족, 독수리족 등 가상 문명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역사적 인물(모세, 히틀러, 마르크스 등)을 재해석한 설정은 독창적입니다. 특히 Y 게임은 인간 문명의 축소판을 통해 진화, 경쟁, 윤리를 탐구하며, 독자로 하여금 "내가 신이라면 어떤 세상을 만들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2. 철학적 깊이:
    소설은 신의 본질, 자유 의지,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끊임없이 묻습니다. "독자"라는 결말은 이 질문들에 명쾌한 답을 주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만드는 열린 결말입니다. 이는 베르베르가 독자를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본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3. 메타픽션의 재미:
    결말에서 미카엘이 독자를 마주하는 장면은 소설의 경계를 허물며 독특한 몰입감을 줍니다. 책을 덮는 순간 "내가 신이었다"는 깨달음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문학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4. 비판적 시각:
    다만, 방대한 서사와 수많은 아이디어 때문에 이야기가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상어족의 나치 비유나 돌고래족의 이상주의 등은 흥미롭지만, 때로 역사적 인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비유적으로만 활용한 점이 아쉽습니다. 또한 결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독자에 따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 감상

저는 <신>을 베르베르의 야심과 상상력이 폭발한 작품으로 봅니다. "독자"라는 답은 단순히 기발한 반전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창조자이자 관찰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신이 되어 문명을 설계하고, 끝난 후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그 방대함 때문에 한 번 읽기로 모든 것을 소화하기 어렵고, 여러 번 곱씹을수록 새로운 통찰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신과 같은가"라는 질문에 "독자"라는 답을 제시한 베르베르의 선택은, 문학이 독자와의 소통으로 완성된다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저는 그것이 단순한 소설을 넘어 독자와 창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이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결말을 어떻게 보셨나요? 추가로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기꺼이 대화에 참여하겠습니다!

3. 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김회권의 『자비 경제학』과 강인태의 『하비루의 길』 비교 서평

Ⅲ. 강인태 : 하나님의 심정으로 성서와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다

남기업(희년함께 공동대표/토지+자유연구소 소장)

하나님 체험에서 시작된 강인태의 독창적인 성서 해석

군포에 위치한 둔대케노시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강인태는 60대 후반의 목사다.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어렵게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했다. 학문에 뜻이 있어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박사과정은 마치지 못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박사를 했고 숭실대 교수의 직함과 이력을 가진 김회권과 비교하면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가 쓴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은 김회권의 『자비 경제학』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한 호소력의 핵심은 김회권의 책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는 점이다.

그의 성서와 역사 해석의 독특함과 탁월함은 어디서 온 걸까? 자신의 영성 체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비움의 길』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체험은 천국을 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병 고치는 능력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투시도, 미래에 일어날 일을 척척 알아맞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체험, 하나님 면전(面前)에 서는 체험이다. 마치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과 거의 유사한 그런 체험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하나님 체험이 성서와 역사를 보는 눈 전체를 뒤바꿔 놓는 사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 그걸 강조하는 사람은 성서 해석이 약하다. 아니 성서 해석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체험을 새로운 성서 해석으로 바탕으로 삼는다. 생생한 하나님 체험이 모세오경과 예언서와 역사서 그리고 신약 성서 전반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했다는 것이다. 2) 체험 이후엔 모세 5경을 읽으면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보면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모세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복음서를 읽으면 제자들의 마음이 되어갔다고 한다. 그의 체험과 영성에 관해서 쓴 『비움의 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영성이 동양의 영성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 혼합주의나 다원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의 영성에는 하나님의 탄식, 아니 통곡이 들어있다.

한편 체험을 바탕으로 성서와 역사를 해석한다고 해서 그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무시한 것도 아니다. 그의 주요 저작인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은 사도바울을 닮아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 선교 신학을 완성하는 데 14~15년이 걸렸듯이 강인태도 체험 이후 10여 년에 걸쳐 기존의 학문 성과와 씨름하며 두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김회권과 달리 강인태의 책은 술술 읽힌다. 물론 본인이 쉽게 쓰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인태의 주장이 김회권이 주장한 모세 5경과 예언서의 주해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인태는 십계명 1계명을 설명할 때 김회권처럼 논증하지 않는다. 강인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의 본뜻은 배타적인 신관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면 이집트에서 겪었던 비참한 노예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러지 말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계명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표현만 달랐지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강인태가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그건 아마도 그의 해석이 상식의 논리로, 자명성의 원리로 접근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 역시 그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하나님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만물의 이치와 ‘법(法)’으로 만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질문과 답변으로 서술된 『하비루의 길』

성서는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가장 긴 역사책이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 방식은 자세한 설명이 아니고 마치 시(詩)처럼 함축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다시 말해서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대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2,500년 전에 기록된 고문서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표현 방법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엉뚱한 해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묻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창세기엔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한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성서 이해에 있어서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강인태는 질문의 답을 구할 때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영성의 길을 끝까지 갔을 때 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정’”(24쪽)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 66권도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이 주어진 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을 받아 적어 놓은 것이 성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하비루의 길』은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질문들은 기독인들이 평소에 궁금해하는 선악과는 대체 왜 만들었는지, 노아의 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가나안을 거룩한 땅이라고 하는지, 등의 76개로 구성되어 있고 이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그의 독창적인 성서 해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호수아서에서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성들을 점령하면서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들까지, 코로 숨 쉬는 건 다 몰살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내용 때문에, 이런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기독인들 때문에 양식 있는 허다한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부담을 느끼고 떠난다. 예수님과 전혀 다른, 잔인하고 배타적인 구약의 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멀게는 십자군 전쟁과 가깝게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강인태는 질문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과연 이런 일을 명령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까지 무자비하게 몰살시켜 버리라고 한다면 과연 참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167쪽) 이렇게 누구든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진 후 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는 토착 하비루(노예)들의 해방운동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우상 종교 속에서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지역 사람들에겐 시내산 율법을 등에 지고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은 해방의 소식이지만, 소수 특권층에겐 재앙의 소식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목적은 빈부와 신분 격차 없는 거룩한 나라 건설이고 가나안 거류민들도 그것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나안 민중은 이스라엘을 뜨겁게 환영했고 소수 특권층은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죽음은 바로 저항하는 소수 특권층에게만 한정된다고 강인태는 설명한다.

이런 해석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선교 방법에 대한 그의 지론이 깔려 있다. 하나님은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탄식하면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방법이 없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거룩한 나라의 모형을 만들고, 열방이 그 나라를 본받아 복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사명은 약탈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가나안에 입주하여 약탈 전쟁을 끝내고 바알 문화를 청산하는 것이 된다. 가나안 7개의 부족뿐만 아니라 그 이웃 나라에도 거룩한 나라가 형성되고 그런 문화가 꽃피우도록 하라는 것이다.

약탈 전쟁과 거대한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잔인한 ‘정복설’을 지지하는 듯한 수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강인태는 기본적으로 여호수아에서 열왕기까지의 책들은 ‘역사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역사서는 사건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일어난 한 참 후에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역사서에는 기록자의 ‘사관’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데, 역사서를 기록한 사관에는 이방인은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는 선민의식과 우월주의가 내재 되어 있고, “숨 쉬는 것은 진멸하라”와 같은 것은 유목민의 독특한 표현방식도 들어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설명이 김회권의 빼곡한 예언서 주해와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든든히 지지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바알 문화의 핵심은 김회권이 말했듯이 자유농민을 파괴하는 대토지 소유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강인태는 김회권과 달리 대외적 약탈 전쟁 금지도 중요한 율법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 준다. 약탈 전쟁 금지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원주민 학살과 사회경제적 차별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식민지 수탈은 철저한 반성의 대상이 된다.

강인태 해석의 독특성은 다윗-솔로몬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강인태는 솔로몬은 물론 다윗까지 비판적으로 본다. 정복 전쟁 금지의 관점에서 보면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8장 1~14절에 나오는 다윗의 끔찍한 정복·약탈 전쟁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는 하락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면 거대한 신전을 지어놓고 제사에 열을 올리는 것은 타파해야 할 이방 종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소규모의 번제단을 만들 때도 정으로 다듬은 돌을 쓰지 말고 계단을 높이 쌓지 말며 자연석과 흙을 사용하게 할 정도로(출 20:25)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요컨대 거대한 신전 건축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윗과 솔로몬의 정치적 프로젝트였고, 정확히 말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정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안내자였던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거대한 성전 건축을 반대한 까닭은 그 공사에 막대한 노동력과 돈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결국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신전과 웅대한 건축물의 크기로 위용을 자랑하는 것은 하비루의 하나님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구나 다윗은 거대한 성전을 짓는 데 들어가는 건축 자재와 재물을 주변 나라에서 약탈해 오는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한 것이겠냐고 강인태는 반문한다. 즉, 거대한 성전 건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체가 배교행위이자 반(反)율법적이다. 그러면서 강인태는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의 사명은 빈부와 신분의 격차 없는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열방이 복되게 하는 것에 있었다는 점을 반복해서 환기시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웃 나라를 약탈하는 전쟁에 승리하게 해주셨다, 성전 건축에 함께해주셨고 축복해주셨다는 구절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에 대해 강인태는 앞서 말했듯이 ‘역사서’라는 것을 통해서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기록은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셨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약탈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했던 과거의 죄악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벨론 포로기에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하다가 망했다는 것을 가감 없이 참회의 관점에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기록해 놓아도 그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이렇게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이런 해석이 김회권의 예언서 주해와 더 조화를 이룬다.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는 것과 주변 나라를 약탈하거나 거대한 성전을 짓고 제의에 몰두하는 것 역시도 질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인태를 통해서 성서를 새롭게 보는 경험을 했다.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을 접한 후에 필자를 괴롭혔던 상당한 질문들이 해소되었고 성서 이해는 깊어졌으며 자연스럽게 신앙도 새로워졌고 ‘전도’하고 싶은 열정이 내 안에 되살아났다. 물론 강인태의 책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논증 없이 선언 혹은 단언하는 까닭에 성서와 다른 책을 보면서 교차 검증할 필요성은 있다.

계약론으로 보는 구원관

강인태는 기존의 구원론을 수정 혹은 전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필자는 그가 이 지점에서 김회권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그의 한계를 넘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언약이 일방이 한 약속이라면 계약은 쌍방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계약의 대상으로 여기시는 것에서 인간의 위상 혹은 존엄성이 드러날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는 전망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계약’의 관계이고 그 계약의 내용이 십계명을 포함한 시내산 율법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아 계약이 파기된 것으로 그는 구약 전체를 해석한다. 요컨대 구약은 계약 형성과 계약 파기와 계약 갱신의 서술인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것을 1차 계약 파기의 결과로,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회개에 의한 계약 갱신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유다는 헬라제국의 헬라화 전략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례와 정결례와 무노동 개념의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중시하는 유대교 율법을 만들어 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계명과 희년을 핵심으로 하는 시내산 율법과 이러한 유대교 율법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대교 율법 관행은 헬라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강화되어 강력한 전통으로 확립되고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 대망론과 결합하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신앙 전통에 젖어 있는 종교 권력자들은 유대교 율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시내산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한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예수님의 회개 선포와 촉구에도 돌이키지 않자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붕괴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이 완전히 파기된 것으로 강인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예수님을 새로운 계약의 체결자로 왔다고 해석하고 두 번째 계약의 대상이 바로 ‘죄인’이었음을 논증한다. 예수님 당시 생업과 가난 때문에 정결례와 무노동 개념의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일반 민중들, 그리고 가난과 온갖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당시의 인과응보적 신앙관으로 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계약의 대상자였다는 것이다. 강인태가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시내산 율법, 즉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정신을 지키지 못한 인간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인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자연스럽게 부여된다.

이러한 강인태의 계약론적 구원관의 강점은 구약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행위 없는 구원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든다. 개인구원/사회구원의 구분도 불필요하다. ‘영혼’ 구원이라는 헬레니즘의 영혼 불멸설에 뿌리 박은 구원론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십)계명을 지켜라”(마 19:17)라는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회권에게는 이런 관점이 희미하다.

그리고 하나 더 첨부하고 싶은 것은 강인태의 계약론적 구원관은 오늘날 기독인을 역사 형성의 능동적 주체가 되도록 격려한다는 점이다.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계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성서를 자세히 보면 신자들의 순종이,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순종의 누적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불러오는 사건으로 꽉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에는 신명기의 말씀대로 바벨론 멸망 이후 고레스칙령(BC 537년)으로 귀환한 역사가 대표적인 예이고, 신약에는 성도들의 박해에 대한 순교적 저항과 놀라운 희년 실천으로 큰 성 바벨론인 로마가 멸망하고 밀란칙령(AD 313년)이 선포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2) 강인태는 ‘길동무’라는 필명으로 본 글이 주로 언급하고 있는 『하비루의 길』, 『죄인의 길』, 『비움의 길』 이외에 『창세기』, 『십계명과 주기도문』, 『요한계시록』,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등의 성서 주해서와 『성서로 보는 우리 역사』 등의 역사책도 저술했다.

3) 이것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테반의 설교와도 일맥상통한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설교에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비판하고 있다.

4) 다윗을 위대한 신앙인으로 보는 성경의 구절들 역사서뿐만 아니라 시편에도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비루의 길』 pp. 231~239쪽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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