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의 관념은 분명 가타리 연구에서 주요한 가이드라인이 된다. 가타리는 주체성의 메커니즘과 구불구불한 망들을 논증하고 재구성하여 사회 체계의 핵심이 되도록 만드는 데까지 이르면서 그 구성요소와 분출의 양상을 탐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정신분석과 예승 주체성을 생산하는 서로 연결된 두 양태 작용의 두 체재 특권이 부여된 도구들의 두 체계는 "문명 안에서의 불안:을 해결할 방법의 가능성 안에서 서로 만난다. 가타리가 주체성에 대해 취하는 중심 입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예술 개념과 예술의 가치를 규정하는데 기여한다. 가타리적 장치 안에서 생산으로의 주체성이 중심축의 역할을 하는데 그 축의 주변으로 인식과 행동의 양식이 자유롭게 논의되고 사회체의 법칙을 뒤쫓아 비약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예술적 활동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어휘의 장을 결정한다. 관습적인 물신화에서 담론의 목록에까지 어떤 것도 그곳에 잔존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예술은 전체적인 생산에서 분리된 하나의 범주로서가 아니라 비언어적 기호와의 과정으로서 정의된다. 사유에 방식과 "삶의 가능성의 발명"(니체)으로서 예술을 분명하게 표명하기 위해 물신주의를 근절하기 : 주체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획득해야할 개체화에 있어 특권적인 영토를 형성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가타리의 사유를 주체성의 탈정착화, 생산의 장에서의 주체성의 전개, 교환의 일반적인 경제구조 안에 주체성의 편입을 이론화하는 거대한 지획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성은 조금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주체성보다 더 구축되고 공들여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은 없다. 조형 예술가가 그에게 주어진 팔레트로부터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는 주체성의 새로운 양태를 창조한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 활동과 많은 유사성을 보여주는 창조 활동인 이데올로기와 사유의 카테고리가 형성하는 집단적 장치의 세계 가운데에서 새로운 배치를 창조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미학에 있어 가타리의 기여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주체성을 탈 정착화와 탈영토화하는 노력, 신성 불가침한 주제인 주체성에 선결된 영역으로부터 주체성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 형성중인 기계적 배치와 존재론적 영토가 증식하는 불안한 연안에 닿기 위한 노력, 불안한.. 왜냐하면 인본주의적인 사유를 선별하는 현상학적 도식과는 반대로 비 인간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증식,, 왜냐하면 이제 그것은 주체성이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 체계의 정체성을 해독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처에서 주체성은 즉각적인 이득을 위해 전유되어 자신의 덫에 빠질만큼 더욱더 권력적인 지배자로 군림한다. 실제로 우리가 집단 장치의 일반적 항목으로 분류할수 있는 사회적 기계와 같은 자격으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적 기계들은 인간 주체성의 중심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주체성이 권력에 절대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경직된 집단 장치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주체성을 끌어내고 풍부하게 하고 재발명하는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인간 주체성에 있어 사실상의 정착화에 대한 이러한 고발은 중대한 공원이다. 현상학은 이것을 그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넘을수 없는 현실의 상징처럼 휘둘렀고 반면 구조주의는 이것에서 미신이나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보았다. 여기에 가타리는 복잡하고 다이내믹한 해석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역시 현상학적 통설에서 통용되는 주체의 신격화에 맞서고 주체성을 기표 게임의 교차점에 놓으면서 구조주의자들이 실행하는 경화에 저항한다. 가타리의 방법론은 자크 라캉, 알튀세르 혹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굳어진 구조들을 물처럼 끓게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구조적 분석의 부동의 질서와 브로델식 역사의 "느린 운동"을 물질이 열의 효과 아래 재편될 떄 만들어지는 참신하고 Dynamic하며 물결치듯 일렁이는 관계들로 대체한다. 가타라의 주체성은 가오스적인 질서에 의해 구정되는 것이지 구조주의자들의 경우처럼 일상의 제도들에 감춰진 우주를 탐구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유기 주의에 조금 더 빠지지 않기 위해 구조주의자들의 발견과 그들의 화용론적 경영 사이에는 분명 폄하할 수 없는 찾아야 할 어떤 균형이 남아있다. 이 균형은 구조들이 더 잘 드러나도록 인공적으로 냉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 온도와 인간 상호적인 관계의 열기를 가지고 사회체를 관찰 한다는 조건에서만 나타날 것이다. 이 카오스적인 긴급함은 일정하게 수행할 작업을 유발한다.
첫 번째 작업은 주체에서 주체성을 떼어내는 것.
주체성으로부터 주체의 자연적인 속성을 만드는 관계들을 와해 시키는 것이다. 그로므로 그것에 개인의 한계를 폭넓게 벗어나는 지도 제작의 지침을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가타리는 사회성을 제어하는 비인격적인 기계조직에 주체의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관념의 지양인 그것의 "재 특이화"에 호소할 수 있다. 주체성의 집단배치를 제어하는 것만이 그로부터 특이한 배치를 발명할 수 있도록 한다. 마르크스가 명백하게 강조한 경제적 소외가 노동의 세계에서 인간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개인화는 생태 - 정신적인 재활용의 장치를 발명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가타리는 주체성이 얼마나 정신적 상부구조에 의존적이며 소외되어 있는가를 환기시키고 해방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 뿐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배경은 가타리가 주체성을 정의하는 용어들에서까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에게 주체성이란 개인적 그리고 혹은 집단적인 심급들이 그 자체로 주체적인 이타성과 인접하거나 한정적인 관계에 있는 자기 준거적이고 실존적인 영토로서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 전체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성은 이차적인 주체성의 현존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성은 그것이 만나는 다른 영토들에서부터만 하나의 영토를 이룬다. 변화하며 형성되는 주체성은 차이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이차이는 주체성 자체를 원칙적으로 이타성으로 구성되게 한다. 바로 주체성의 이러한 다원적이고 다성적인 정의 안에서 가타리는 원근법적 동요를 철학적 구조에 경험시킨다.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주체성은 자율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주체의 실존에 있어 근거가 될 수 없다. 주체성은 "인간, 그룹, 사회-경제적 기계, 정보적 기계"와의 연합과 같은 결합의 양식에 근거해서만 실재한다. 강렬하고 결정적인 직관 '포이레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의 힘이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써 정의하는 것이라면 가타리는 주체성을 개인과 그가 만나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인간적 혹은 비인간적인 주체화의 몇 매개체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규정한다. 결정적인 쾌거: 주체의 측면에서 주체성의 본질을 찾아 왔고 영원히 중심에서 벗어나 주체성의 본질을 비기표적인 기호 체제들 안에서 이해되는 것으로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가타리는 구조주의적인 지시 세계에 의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기표는 레비스트로스의 숲에서 처럼 가타리의 '기계적 무의식'안에서 지배자로 군림한다. '집단적인 주체성의 생산'은 개인이 스스로를 동일시 할 수 있을 '최소한의 영토'를 구축하는데 쓰이는 지표를 다량으로 제공한다.
주체성의 생산을 구성하는 이 유동적인 지표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문화적 환경과 문화적 소비, 기발한 장치들, 주체적 기계 조직에서 떨어진 조각들 등등 마지막으로 정보적인 기계 조직 전체로 이것은 실제로 정보적 기계 조직이 의미 작용을 생산한다는 사실과는 독립적으로 혹은 동시에 기능하는 현대적인 주체성의 비기호학적이고 비언어적인 목록을 형성한다. 특이화/개인화의 과정은 바로 몸에, 환상에, 지나가는 시간에, 삶과 죽음의 신비에 새로운 관계들을 발명하고 또한 사유와 행동의 획일화에 저항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서 이 지표를 사적인 존재론적 영토안에 통합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 생산은 일종의 정신적인 생태 철학을 면밀히 검토 해야만 한다. 이렇듯 개인적인 주체성은 이 기계 조직의 생산물을 다루는 것에서부터 형성된다.
불일치와 차이, 거리두기 작용의 결과인 그것은 환경에 관련된 문제들이 생산관계 전체와 그렇듯이 사회적인 관계 전체와 분리될수 없다. 존재를 상호 의존적인 망으로써 다루면서 개체 생태학에 속하는 이러한 규정은 가타리가 예술적 사물과 맺는 관계를 규명한다. 생태학에 관한 가타리의 사유는 약을 '직업적인' 것으로 삼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먼저 근대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아직도 사용되는 낭만주의적인 모델을 폐지할 것을 의식하게 했다. 따라서 가타리식의 주체성은 지난 삼십여 년간 예술가들의 실천에 의해 오히려 정당화된 하나의 실행적인 패러다임을 미학에 제공했다.
칸트가 자연의 형태 전체와 풍경을 미학이 적용되는 장안에 받아들였다면 헤겔은 작품이 정신에 의해 형성되는 특별한 대상이라는 분류에 그 장을 축소시키고 제한했다. 우리가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는 낭만주의 마학은 인류의 주체성의 결과물인 예술 작품이 한 주체의 정신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전체한다. 지난 20세기동안 수많은 이론들이 결코 그 기반을 완전히 전복시키지는 못한채로 창조에 대한 낭만주의적 해석들에 대해 논의했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레디메이드는 작가의 개입을 일련의 오브제를 선별하는 것과 개인적 언어체계 안에 그것을 게제하는 것으로 축소했다. 그렇게 예술가의 역할은 현실에 관련된 책임감의 관계로 재정의 되었다. 또는 로제 꺄이르와의 일반화된 미학 역시 그렇다. 일반화된 미학은 우연과 증식, 유형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들과 프로젝트의 결과인 형태들을 동등한 지위로 놓는다. 가타리의 테제들이 천재의 낭만주의적 개념을 거부하고 예술가를 비밀스러운 신적 영감에 의존하는 순수한 창조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 실행자로 상징화함으로써 구조주의자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나갈지라도 그것이 꼭 저자의 죽음과 관련된 구조주의자들의 찬가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가타리에게 그것은 가면(쓰기)의 문제이다. 주체성의 생산과정이 바로 그들의 공동체화의 전망안에서 재규정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주체성의 독점권을 갖지 않는 개인에게 저자의 모델과 그 소멸을 가정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체성의 생산 장치들은 한 개인의 언어 게임의 규모와 마찬가지로 메갈로폴리스 규모로 존재할 수도 있다. 주체성의 생산과정이 바로 그들의 공동체화의 전망안에서 재규정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주체성의 독점권을 갖지 않는 개인에게 저자의 모델과 그 소멸을 가정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체성의 생산 장치들은 한 개인의 언어 게임의 규모와 마찬가지로 메갈로폴리스 규모로 존재할 수도 있다. 예술적 역할놀이와 그것의 상품 체계를 구조화하는 개인과 사회간의 낭만적인 대립은 완전히 통용되지 않게 되었다.
예술가 - 실행자의 태도를 위해 저자로서의 태도의 중요성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창조적 실행의 횡단주의적 개념만이 현재의 변화를 인식하게 할 수 있다.
뒤샹, 라우센 버그, 보이스, 워홀 등 이들 모두는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예술가에게 부여한 정신적 상아탑의 신화를 해체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사회적 흐름과 일치하는 교환의 체계위에 세웠다. 20세기 동안 이루어진 예술 작품의 점진적인 비물질화가 노동의 영향 한가운데로의 작품의 출현과 동반되었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이 갖는 교리의 메커니즘을 예술의 경제 안에 봉인하는 서명은 물화되고 불임적인 분열을 이용해서 다성성의 상실 즉 다의성이라는 속성을 지닌 주체성의 원시적 형태의 상실을 함의한다. 이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 가타리는 "카오스 모제"에서 한 동일한 개인에게 수많은 고유명사를 부여하는 원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용되는 실천행위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다성성은 또 다른 수준에서 이질적인 영역들을 이어주는 주체화의 복합체 안에서 재구성된다. 그 복합체는 '개인-집단-기계-다양한 교류'의 블록들로 그것은 정신분석적 치료의 범위 안에서 사람들에게 실존적인 신체성을 재구성할 스스로를 재특이화 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는 주체성이 어떤 동질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주체성은 정신적 삶에 있어 단일개체에 대한 환영을 세분하고 분절하는 즉 분할에 의해 발전한다. 주체성은 일방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다른 신급들을 인도하는 결정적인 어떤 지배적 심급도 인정하지 못한다. 예술적 실천들에 적용된 이 사실은 양식에 대한 개념의 완전한 붕괴를 불러일으켰다. 서명의 권위를 갖춘 예술가는 자주 일종의 유일한 원칙인 그의 양식을 둘러싼 수공적이고 정신적인 재능의 지휘자로써 소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근대 서구의 예술가가 주체성과 양식 사이에서 예측된혼란을 유지함으로써 서명은 의식의 상태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주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많든 적든 각자가 자신의 책임으로 작업하는 주체화의 구성체들이 합의된 환영의 효과 그 정식 자격의 수호자는 상품의 조증서인 서명과 양식인에 의해서만 통합되어 나타낼 때 우리는 여전히 창조적 주체, 저자 그의 대가적 자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타리의 주체는 이질적인 주체화의 장들이 만나 파생된 새로운 결합에 유사한 독립적인 판들로 형성된다: 가타리에 의해 묘사된 “통합적 세계의 자본주의(C.M.I)는 예슬이 그 임무로 생산하는 “존재론적 영토”에 개의치 않는다.
행동의 획일화와 물화의 요인인 C.M.I는 서명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평가로 인해 자신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다. 즉 이 영토들을 생산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계속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을 “삶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그곳에서 C.M.I는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썼듯이 진정한 양식이 물화된 “기법”의 반복이 아니라 “사고의 운동”이었다면? 가타리는 “이질 발생의 과정” 안에 존재를 결부시킬 필요성을 주체화의 동질화와 규격화에 대비시킨다. 이것이 정신적 생태 철학의 첫 번째 원칙이다: 예외적 삶의 형태들과 특이한 세계들을 분절하기: 사회 문제에 내에서 차이를 지나치기 전에 차이 그 자체에 관심을 쏟기. 이처럼 가타리의 모든 진술은 사회적 관계의 내적이고 선결되어야 할 모델화에서 유래한다. 주체성에 대한 생태주의적인 변화가 부재하고, 주체성의 기본적인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채로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그는 정신 구조와 사회적 구조의 공동의 변화에 호소했던 세기의 아방가르드 대부분과 유사한 연결점을 갖는다.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상황주의자들은 상부구조(이데올로기)가 완전하게 개혁되는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하부구조(생산의 장치들) 내에서 어떤 것도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전체적인 혁명을 불러일으키길 시도했다. 이렇듯 인간의 상이한 요구들을 연합하는 데 적절한 “미학적 패러다임”의 보호 아래서 “3 가지 생태학(환경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에 대한 가타리의 변호는 근대 예술적 유토피아의 노선 안에 위치한다.
무의식 자체는 “제도, 집단적 장치”와 동일시되고 있다. 방법론 안에서의 영원한 개혁? “저자들이 확실한 이론적 토대나 그룹, 학교, 콘서베이터리 혹은 아카데미의 권위를 이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각각의 구체적인 수행은 미래의 새로운 전망을 창시하고, 혁신하고 발전시키는 사명을 갖는 회화나 문학과 같은 영역에서처럼 진행 되어야만 할 것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과정중에 작업이다: 사유는 수사학과 유서가 아닌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는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에 부여한 정의, 즉 “개념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예술” 이라는 정의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가타리는 “미학적 패러다임”으로부터 과학과 기술 전체의 개혁을 원한다. “나의 관점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과학만능주의의 패러다임에서 윤리 - 미학적 패러다임을 향하여 이동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일종의 과학적 회의주의에 접근하는 희망: 그에게 이론과 개념들은 수많은 다른 것들 중에서 “주체와의 모델”의 가치를 지낼 뿐이며 어떤 확신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포퍼가 언술하듯, 과학성의 첫 번째 기준은 반증 가능성이 아닐까? 가타리에 의하면 미학적 패러다임은 모든 담론의 범위를 전염시키는 것, 모든 지식의 장에서 창조적 불확실성과 정신착란적인 발명의 독을 퍼지게 하는 것에 요구된다. 자칭 과학적 “중립성”의 부정: “이제 시사성이 있을 것은 바로 ‘미래주의적’이고 ‘구축주의적’인 가상성의 장을 발굴하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정신 분석가의 초상: “한 예술가가 그에게 맞는 특징을 그의 동시대인들과 앞선 사람들에게서 차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읽는 사람들이 내 개념들을 자유롭게 취하거나 거부할 것을 권한다”
예술과 심리적인 삶은 동일한 배치들 안에 뒤얽혀 있다: 가타리는 심리현상의 메커니즘을 더 잘 구체화하기 위해서만 예술을 비물질적인 용어로 기술할 뿐이다. 예술적 활동에서처럼 분석에서도 “시간은 수동적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대응하고 방향을 결정하고 의미 있는 변화의 대상이다” 분석가의 역할이 “주체화의 돌연변이적인 안식처를 창조”하는데 있다면 이 공식은 예술가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타리에게 예술 작품은 “수동적인 재현의 이미지” 즉 하나의 생산품에 관한 것이 아닌 한에서만 흥미로운 것이다. 작품은 존재론적 영토들을 구체화한다. 존재론적 영토에서 이미지는 주체화의 매개체 역할, 즉 우리의 지각이 다른 가능성들에 재접속되기 전에 지각을 탈영토화 하는데 적절한 “변속기의 역할” 그러니까 “주체성에 있어 분기점을 조작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서 다시 예술작품이 비록 미학에 그것의 고유한 속성인 “정념적인 인식”의 모델 즉 “지속에 대한 비논리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독점권도 과시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의 방식은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것에서 순수한 희열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가타리는 독일 철학의 생기론을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심리 - 생태학적 어휘의 장안으로 전치하면서 니체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렇게 그는 미학적 관조에서 “주체화의 전이” 과정을 본다. 미하일 바흐친에게서 차용한 이 개념은 “표현의 진료”가 “형식적으로 창조적”이 되는 순간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전이의 순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가타리 의 가정은 마르셀 뒤샹이 1954년 휴스턴의 유명한 강연에서 “창조적인 과정”과 관련하여 발표한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관객은 “(예술가가) 실현하려고 계획했던 것과 그가 실현한 것 사이의 차이”인 “예술의 계수”라는 수단으로 창작의 비밀에 침투함으로써 작품의 공동-창작자가 된다. 뒤샹은 이 현상을 정신분석학과 유사한 용어들로 설명한다: 그것은 “예술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전이”에 관한 것으로 작품 앞에서 관객의 반응이 “색, 피아노, 대리석 등과 같은 불활성의 재료를 통해 일어나는 일종의 미학적 상호 침투”하에서 일어난다. 가타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이 과도기적 이론을 계승하여 주체성의 유동적인 특성에 관한 자신의 직관에의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가 본 것처럼 이 주체성의 구성요소들은 이질적인 “존재론적 영토”에 일시적으로 엉겨 붙어서 작용한다. 예술 작품은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바로 그 미학적 시선의 매혹적이고 유사 최면적인 과정은 그 주위로 주체성의 각기 다른 구성요소들을 결정화 하고 새로운 시점들을 향해 재분배한다. 예술 작품은 완성된 오브제와 닫힌 총체성 위에서 실행되는 고전주의적 미학적 지각이 규정하는 완충장치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유동성을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문제 제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가타리는 후자(예술의 자율성)을 라캉의 무의식에 있어서의 대상a처럼 “상대적인 주체의 자율화”의 혜택을 입을 뿐인 “부분적인 대상”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지각들과 정서들을 통한 세계 인식”이라고 예술적 행위를 규정하는 것에 있어 한계에 닿는다. 왜냐하면 주체성의 이질적인 구성체들의 특이화 움직임으로 소환되는 부분적인 대상의 개념 자체는 일종의 전체성의 개념으로 귀납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되는 “부분적인 발화자”는 인간 활동의 특정한 카테고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예술작품은 “정서들”과 “지각들”의 구도가 제시하는 이 특별한 배열 방식에 제한될 수 있을까? 전적으로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 또한 사유의 전체적 경험의 틀 안에서 지각과 정서 작용에 필요한 개념을 제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능의 측면에서 공격당한 카테고리화는 사유의 토대가 되는 물질적 질료의 구도 위해서 필연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가타리 텍스트들 자체에 의거해서 예술의 목표를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삼으면서 예술의 개념을 지각들과 정서들의 구축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생태 철학적 행동은 환경 사회 문제 그리고 주체성 사이의 윤리 - 정치적인 분절적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상실된 정치적 영토-“통합적 세계의 자본주의”의 탈영토적 폭력에 의해 분열되었기 때문에 상실된-를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현대는 그룹과 개인의 존재론적인 영토의 일관성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적인 재화와 비물질적인 재화의 생산을 고조시킴으로써 점점더 불합리하고 절망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주체성에 거대한 공백을 낳았다.” 그리고 총체성과 상호 의존성의 관념에 중심을 둔 생태 철학적 실천은 주체성의 작용에서부터 철저하게 소수가 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존재론적 영토들을 재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철학은 “사회적 문제, 사적인 것, 시민의 문제를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낡은 이념을 대체할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예술이 주체성의 실행을 위해 매우 조직적인 동시에 “매력적인” “내재성의 구도”를 제공하는 한, 그 예술은 유용한 보조물로 드러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주요 주창자였던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적 이론이 예술에 부여했던 자율성을 현대예술이 거부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만큼 더욱더 그러하다.
예술은 오늘날 방법론과 개념을 도입하는 장소로서, 즉 잡종 형성의 영역으로서 규정될 뿐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로베르 필리우가 언급한 것처럼, 예술은 모든 일탈적인 실천들-자연스런 층위에서는 그 자리를 찾지 못하는 실천들-에 즉각적인 “불가침권”을 제공한다. 다른 영역에서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지난 30년 동안의 수많은 우수한 성과들은 유일하게 예술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마르셀 브로타스는 이미지 안에서 시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요셉 보이스는 형태 안에서 정치를 계속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가타리는 이 미끄러짐 즉 더욱 다양한 생산체계를 포함할 수 있는 모던아트의 능력을 기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특별한 직업의 집단이 지도하는 특정한 활동으로서의 예술을 기꺼이 비판한다. 병원에서의 경험 중 많은 부분은 마침내 “동업 조합주의 주체성”이라고 하는 세분화된 지식 앞에서의 놀라움 안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동업 조합주의 주체성은 “세부화”의 반응에 있어 우리를 “동굴 예술 모든 것에 본질적으로 기술적 문화적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하도록 하면서 동굴 예술을 미학화하게” 한다.
현대 예술가들의 실천에 이상적으로 적용되는 정의이다: 지금까지 예술의 장을 한정짓던 구체적인 대상들 대신에 작업방식과 존재 방식을 포함하는 존재의 장치들을 창조하고 연출하면서 현대예술가들은 시간을 재료로 사용한다. 형태는 사물 보다 앞서고 흐름은 카테고리 보다 앞선다: 행위의 생산은 물질적 사물의 생산 보다 우세하다. 오늘날 관람자는 지시 세계에 갇힌 내재적 대상을 관조하기 보다는 “일시적이고 촉매적인 모듈”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인도되었다. 예술가는 작동 중인 주체와의 세계로서 그리고 그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의 모델로서 나타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는 특권화된 경험의 대지이고 그의 작품의 종합적인 원칙 - 모더니티의 모든 역사가 예시하는 발전인 -이 된다. 예술의 대상은 이 행동의 경제에서 상업적 유통에 저항하는 동인이거나 혹은 이 유통의 모방적인 기생자가 되는 일종의 실망스런 아우라를 획득한다. “레디메이드”가 자율 생산적인 조형적 장치 안에서 재활용되고 수용되는 집단적 생산 (일련의 오브제세트)으로서 특권적인 모델이 되는 정신적 세계에서, 가타리의 사유체계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예술의 변화를 사유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점이 가타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에게 미학은 무엇보다도 사교적 변화를 수반하고 전환 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시적 기능이 “윤곽을 드러내는 야만성과 정신적 내파, 카오스 모제적 경련의 시험을” 극복하고 “그것을 예측 불능의 풍요와 즐거움으로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주체화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시적기능은 아마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