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리고 돌아보는 2023년

minami·2024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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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전에

2023년이 어땠는지 한 해를 돌아보고, 2024년 새해를 맞이하는 감상을 적어보는 회고글을 적어보기엔 벌써 2월을 거의 다 흘려보낸 시점이다. 그럼에도, 이제라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미련을 떨치고 나의 2023년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에서 2023년 11월 말 경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뒤통수가 깨졌으니까^^

당장에 회고 글을 빙자한 아무 넋두리라도 써서 올리고 싶었는데 서류 처리까지 완료되어 회사와 완전히 굿바이를 외치기 전까지 좀 참았다. 얼른 모든 것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과 평온함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건 뒤늦은 2023년 회고이다.

✂️2023년 회고 시작

인 줄 알았지? 짧게 2022년 리마인드부터 해보자.

작년에는 이 회사에서 빠르게 적응하고 기대치보다 더 해내야 하는 시간을 보냈다. 스타트업 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당연한 부분이었다. 수습 한 달 차에 인턴이건 뭐건 이전 경력들은 모조리 후려쳐서 없는 셈 치고 신입 경력과 연봉에 n년 경력직 같은 퍼포먼스를 원했던 것은 이제 그러려니 해주겠다.

그래도 내가 또 해내버린 덕분에! 본래 3개월인 수습도 각성해서 2개월 만에 끝내버린 덕분에! 야근과 주말출근 불사하며 열일해버린 덕분에! 2023년 연봉 협상 결과물이 2%... 아니, 20% 정도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절대적인 금액과 인상률만 보면 괜찮을 만큼 연봉도 높아졌다. 작년 상반기 끝물 즈음에 입사해서 12월에 연봉협상을 한 거니까 반년 정도 만에 빠르게 연봉이 오른 것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또한, 회사에서의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팀 구분 없이 다른 동료 분들과도 두루 잘 어울려 지냈고, 특히 술 자리 같이 편한 자리에서 술 좀 취한 우리 프론트엔드 파트 팀 동료 한 명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료분들에게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을 자주 해주곤 했으니까.

뭔가 해보려나 보다 했던 2023년 상반기

그렇게 2022년을 성공적으로 떠나보냈나 싶을 때쯤 회사에서는 또다시 조직개편 소식이 들려왔다. 조직개편은 입사 직후에도 겪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겪었고, 또 있었나...? 어쨌든 새해를 맞아서 변화를 꾀한다고 하니, 반쯤은 그러려니 싶었고 나머지 반쯤은 이번엔 바뀐 조직 형태에서 정말 잘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때까진 아직 긍정적이었군.

다행히 막상 까보니 이상했다, 같은 건 아니었다. 스타트업 스테레오타입에 맞지 않게도 특유의 경직된 분위기가 있는 회사에서 (좋은 쪽으로) 신기한 방식으로 조직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토스의 사일로가 아마 비슷한 예일 것이다. 나도 PO의 설득으로 한 팀에 새롭게 들어가게 되면서 걱정도 조금 있었지만 내심 신나기도 했다. 우리가 맡은 프로덕트를 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2022년부터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벌써 지쳤나 싶었을 때에 적절한 리프레시이자 동기부여가 되었다.

내가 입사 초기에 받은 질문 중에 "우리 회사에서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 서비스를 소개할 수 있도록 잘 만들어내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였다.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일이 완전히 없진 않았다. 심지어 이직을 생각할 정도로 기획부터 결과까지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대략 한 달 동안 팀에 소속된 모든 인원들이 달라붙어서 기능을 열심히 만들어내어 배포까지 했는데 결과지표가... 아니, 사실은 애초에 타겟 설정부터가... (이하 생략)...

이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정말 이때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결과를 다같이 톺아보는 자리에서도 도저히 할 말이 없었을 지경이었고, 그 자리에는 1n년 경력의 시니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뭐, 이미 일은 끝났고 애초에 No해야 할 때 No를 외치자는 사내 행동 강령을 따르지 못하고 진행시켜버린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롭지도 않으니 지금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이건 아무리 No했어도 Go했을 것 같지만

이쯤에서 좋은 게 없었다는 뜻은 아니란 점을 상기한다. 원래 잡플래닛이나 블라인드에도 좋은 후기보다는 안 좋은 후기가 많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기억을 미화하는데도...

깨알같은 사내 사이드 프로젝트도 해보았지

잊어버릴 뻔 했는데, 2023년의 시작과 함께 사내에서 사이드 프로젝트 격으로 진행한 건이 하나 있었다.
요즘 같이 찬바람이 부는 업계에서 명색이 금융을 다루는 핀테크 기업인데 금융으로 한번 도움을 줘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구성원은 자발적 참여자들로 이루어졌고, 모든 게 우리 참여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하고 인원을 모집했던 대장님은 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프로젝트의 취지가 이미 좋았기 때문에 나도 냉큼 손을 들었는데 아이디어를 디벨롭하고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가치를 담은 프로젝트 이름과 이미지를 만들어서 웹페이지를 만들고 홍보하는 모든 과정이 정말 즐거웠다. 업무는 업무대로 하면서 업무 외적으로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성이었기에 업무 끝나면 이것도 해야 했는데도 재미있었다.

반쯤 등 떠밀리다시피 얼떨결에 팀장직까지 맡아서였는지 이때 사이드 프로젝트의 재미에 눈을 뜬 것 같다. 그 후로는 바빠서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는 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왜 다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이 첫 사이드 프로젝트이다 보니 처음 해 본 것들도 많았다. 기억에 가장 남은 건 우리 팀원으로 참여한 모바일 개발자인 동료가 웹페이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처음으로 TypeScript+React 조합을 누군가에게 가르쳐보는 귀중한 경험을 얻은 것이다. 내가 잘 떠먹였는지는 모르겠고, 받아먹는 사람이 너무 잘 받아먹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굉장히 오랜만에 React 프로젝트 초기 세팅도 해보았고, 코드 스타일도 회사 컨벤션을 따르기 이전에 내가 쓰던 것에 가깝게 작성해보기도 했다. 여러모로 취준생 시절에 팀 프로젝트를 하면서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느낀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지금 어떻게 되었냐고?

씁쓸

어느 정도 진행이 되다가 잘...은 아니고 슬그머니 종료되었다.

딴 생각으로 시작한 2023년 하반기

앞서 잠깐 언급했던 충격적인 일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이직을 생각하는 것으로 2023년 하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잠들어 있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의 내용을 조금씩 업데이트 했고, 때마침 원티드에서 모집하던 프리온보딩 강의도 하나 신청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정도는 그냥 이직 생각이 없어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자고로 새 직장을 얻으려면 어쨌든 이력서를 직접 돌리거나, 커피챗을 통한 면접을 본다거나 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하지 않은가. 내가 한 건 그냥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 다들 알다시피 이력서를 정리해보면 현실을 자각할 수 있다. 이직 준비는 매우 귀찮고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란 걸.

고백하자면 귀찮음을 무릅 쓰고 수정한 이력서를 몇 군데 넣긴 했다.
지금은 프리온보딩 강의가 완전히 무료가 되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강의료가 있었다. 강의료는 10000원으로 이미 부담 없는 가격이었지만 원티드에서 지원을 n번 이상 하면 그마저도 환급해줬다.
나는 기어이 강의료 환급을 받으려고 딱 개수만 채워서 대강 이력서를 냈고,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내가 지금 회사를 나와서 이러고 있진 않겠지😀

하반기 시작과 동시에 찾아왔던 찰나의 방황에는 봄이 시작될 즈음부터 이따금씩 동료가 떠나는 걸 본 영향도 아마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중 몇 가지는 나 역시 공감했다. 어느 조직이나 잘 고쳐지지 않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나도 벌써 이 기업에서 1년을 넘기고 있는 시점이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지치고 있기도 했다.

여태껏 지나온 내 커리어를 보면 먼저 떠나는 건 나였는데 지금은 남아있는 입장이 되니 괜히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 간혹 들기도 했다. 원래도 웬만한 약속은 거절하지 않는 내가 참 부지런히도 술을 마시고 다녔던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아닌가? 심지어 이 당시에는 업무조차 잠시 한가해져서 타이밍이 참 그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술

어쨌든 난 개미처럼🐜 뚠뚠 열심히 일을 했네 뚠뚠🎵

싱숭생숭한 마음을 급하게 갈무리하게 된 것도 역시나 갑자기 몰아치는 업무 때문이었다. 일해라 직장인아!

이때 시작한 업무는 지금에서야 생각하건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처럼 시작부터 개운하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게 규모가 큰 프로젝트가 될 것 같은데도 그간 해왔던 중소규모의 일감인 것처럼 PO가 소개를 하기에 어리둥절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런 기조가 마지막까지 이어져서 나중엔 어느 정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는 당시 회사에서 주력으로 밀었던 것과도 결이 같고 고객들도 환영할 만한 것이었기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준비를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새로운 메뉴로 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기능이었기 때문에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상반기에 생긴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처음 합을 맞춰보게 되기도 했고, 연초에 조직이 바뀌면서 다른 팀으로 헤어졌던 동료와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 프로젝트는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 불안한 마음과 설레는 마음을 동시에 안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진행될수록 점점 이 회사의 고질적인 문제와 엮여서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바로 입사 초부터 계속 겪어왔던 일정 문제였다. 그게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빨리빨리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냥 ‘그들’이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아무 지식이 없고 그걸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하나도 모르기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nn일을 주면 제품이 뚝딱 완성되는 줄 아는 누군가를 위해 버퍼 없이 정말 내 일만 딱 치고 빠지는 일정으로 산정해줘도 결과적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 = 내가 예상한 시간 - 최소 일주일 이었다. 제가 빡친 것처럼 보이나요? 정답은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전부터 일정 조정이 필요하다는 말도 없이 맨데이를 산정해달라고 한 다음에 산정을 해주면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예상한 최소 일정에 한참 못 미치는 일정으로 이미 보고가 끝나 있곤 했다. 내가 입사한 이래로 거의 모든 업무가 그런 식이었다. 모든 회사에서의 일이 전부 그렇다는 구라는 치지 말자. 안 그런 곳이 더 많다. 이건 정말 이곳만의 고질병 같은 문제가 맞다.

다른 때라면 어떻게든 했겠지만 처음부터 이건 규모가 큰 프로젝트라고 수 차례 얘기했음에도 FE 담당이라고는 나 혼자 뿐인 채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정까지 빠듯하게 제멋대로 보고까지 올라가서 확정된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게 스트레스가 컸는지 컨디션도 내내 저조한 상태였어서 이때 정말 감기약을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원을 늘리거나 일정을 늘려달라고 끊임없이 의견을 개진함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업무를 계속 쳐나갔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충원이 되긴 했는데 맨데이 산정했던 것을 보면 나 포함 셋은 되어야 개발 일정을 맞출까 말까이고 그나마도 QA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겨우 한 명 더 붙여준 게 끝이라 여전히 불안함에 삐걱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일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항상 이 모양이었기 때문에 화도 안 나고 매우 평온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될 거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이 프로젝트를 무사히 완수하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3년을 마지막까지 불태우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낙천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정말정말 하기 싫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조금 더 야근하고, 내가 주말에 출근해서 일 조금 더 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또 해내고 말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말은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사망 플래그나 다름없었다.

정준하 과장 귀하 그동안 (주)무한상사를 위해서 애써주신 귀하의 노고에...

분위기가 이상해진 건 즐거운 추석 연휴를 보낸 직후부터였다. 한창 시동을 걸고 달리기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무기한 연기되면서 사실상 엎어졌다.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르겠는 조직 개편 소문이 또 돌기 시작했고, 뭔가 어떤 일이 진행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먼저 알려주지는 않았다. 일년 내내 스트레스 때문인지 사무실 공기 질이 나빠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하여간 감기에 걸린 상태가 디폴트여서 기침 때문에 일부러 내 자리보다는 라운지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을 만큼 사무실이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1년 반이 넘는 재직 기간 동안 5번쯤은 조직 개편을 겪었고 그때마다 어수선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그 이유는 그때쯤부터 통보가 조용히 대거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트랩 발동이라도 된 것처럼 물밑작업으로 이루어진 통보에 당사자들도 당황스러워했다. 인사팀에서 훗날 나에게도 그랬듯 무어라고 이유를 대면서 설명을 해주었겠지만 딱히 그런 통보 방식부터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제삼자 입장에서는 선정 기준도 딱히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기준으로, 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유를 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모두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여기서 또 이 조직의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더 나온다. 2023년 들어서는 타운홀도 없어지면서 전사 목표나 방향을 공유하는 창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평소에도 지금 사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음알음 귀동냥으로 알아내야 했다. 그게 계속 이어져서 명단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내보낼 만큼 상황이 심각해져도 임직원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게 된 것이다. 더 화가 나는 지점은 소수의 선발된(이것도 무슨 기준인지 모른다) 직원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 인사팀이나 재무 등 이런 상황에 가장 밀접한 부서의 소속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해고 대상자가 되어서 회사를 나오기 직전까지도 나는 혼자서 스스로 이 사태에 대해 열심히 알아보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한 덕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었으나 여기에 더 이상 세세한 사정을 다 밝혀서 작성할 생각은 없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냥 제발 이 회사랑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

여하간에 이때 우리 개발팀만 해도 거의 일주일 내내 송별회를 하다 못해 여러 명을 모아서 한 번에 송별회를 해야 했을 만큼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나는 팀에서 살아남은 쪽에 속해 있었지만 떠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이 있다면 나겠구나. 우리 파트에서는 이제 나 말고는 나갈 사람이 없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설명하자면 입사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우리 팀원들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고 어쩌고 웅앵웅... 하게 되므로 그냥 촉이 왔다는 말로 갈무리하겠다.

좋지 않은 예감에 오히려 내가 먼저 선수 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었다. 멀쩡히 일을 잘하고 있는데 해고를 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내 커리어나 개인적인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도 문제였다. 여러모로 좋을 것이 없으니 어차피 잘릴 거라면 그냥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내가 나가겠다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NAGASEYO

그러나 내가 선빵을 치기 전에 회사가 더 빨랐다. 쳇, 눈치 게임 실패. 그것도 고객 문의로 발견된 버그를 고친 버전으로 배포 공지를 띄우고 배포를 하기 직전에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호출을 당했다. 물론 배포가 더 급하기에 배포가 끝난 직후로 면담 시간을 미루긴 했지만, 호출을 당한 순간 이미 나를 호출한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역시 다음은 나였구나. 예상이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막상 닥쳐보니 기분은 확실히 더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나빴다. 위로의 말이나 앞으로 어떤 절차가 기다리고 있는지 설명도 해준 것 같은데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로도 두세 번 더 인사팀이며 조직장이며 면담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하나마나한 소리들이었으리라. 어차피 회사에서는 추후 절차나 보상 같은 것들도 이미 정해놓았고 나는 그냥 예스맨처럼 예스만 하면 되었다. 정말이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별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럴 때 차라리 일이라도 많았으면 적당히 뻗대는 것으로 내 기분과 처지를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프로젝트가 엎어진 후로는 아예 일감 자체가 없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도리어 금광을 캐는 심정으로 마지막 출근날까지 일을 찾아서 했다. 출근을 해도 업무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으니 새롭게 할 일이 없었다. 원래도 업무 지시를 하는 사수나 직속 상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직접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환경이기는 했지만, 신규 기능 개발이나 기존 기능 고도화 같은 프로젝트가 항상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할 일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이젠 정말 완전히 일이 없어져서 내가 나서지 않으면 기계적으로 출근해서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직까지 당하는 판국에 그렇게 시간만 죽이면서 앉아 있기는 싫었다. 취업 준비나 공부를 하는 것도 약간의 현실 부정 때문에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빌드할 때 뜨는 작은 경고 문구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고치는 작업을 조금씩 해나갔다.

그렇게 조금은 절박한 심정으로 일한 것을 다른 동료들은 또 좋게 봐주었다. 나중에 동료에게 직접 들은 것인데, 마지막까지 일감을 찾아다니면서 코드를 이리저리 뚝딱뚝딱 고치고 리팩토링하고 갔다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마지막을 정한 건 내가 아니었지만 어떤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줄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었나 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었다면 나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이때 전에 고질적인 일정 문제🙃시간에 쫓겨 기능 구현을 하는 바람에 분명 언젠가는 버그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부분도 고쳐 내서 내 마음의 짐을 덜기도 했으니까.

✂️2023년 회고 끝

2024년은 다를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해가 있었을까 싶다. 2023년은 말 그대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해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연말에 겪은 일은 물론 좋은 쪽으로 볼 수 없다. 어찌 보면 최악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동안 유종의 미, 유종의 미 노래를 불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2023년을 잘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2023년 마무리가 망했다면 그 대신에 2024년의 시작은 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를 꽤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려고 하고, 안 좋은 건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을 준비하려고 한다. 이미 끝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가족과 함께 쉬는 시간을 보내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고 나니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고 벌써 시작한 일도 생겼다.

오늘을 기준으로 벌인 일들 중에 확실히 정해져서 밝힐 수 있는 것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컴퓨터과학과에 편입한 것과 로켓펀치에서 진행하는 취준컴퍼니에 참여한 일이다. 실업급여 받으려면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이 기쁨 또한 백수일 때 가장 크게 누릴 수 있다. 정신승리 아님

시작부터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이번 2024년에는 제발 용두사미가 아닌 유시유종이 될 수 있길.

마지막으로 개발자 회고답게 Github 결산은 해보고 끝내자

2023contributions

2023년 Github 계정 결산

  • 회사 계정
    • 총 기여 횟수: 2533
    • 하루 최대 기여 횟수: 83

내 회사 Github 계정의 잔디는 내 개인 Github 계정의 잔디보다 정말 푸르디 푸르다. 그리고 정직하다. 쉬었던 날만 정말 깨끗하게 비어있다. 하루에 83회의 기여를 했다는 것은 나도 놀랍지만 시간에 쫓겨서 열심히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실제로 git log나 PR을 올린 횟수를 세어보면 83보다 더 될지도 모르겠다. 가끔 보이는 공휴일/주말 출근의 흔적은 웃어넘겨야지^^

길었던 2023년 회고 진짜 끝

잘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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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아가는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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