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지식과 진리 / 가르침과 깨달음) ft. 헤르만 헤세

박하영·2022년 5월 28일
0

독서

목록 보기
1/3
post-thumbnail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 헤르만 헤세

처음 책을 읽기 전에 그리고 이제 막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책 뒷 편에 나와있는 헤르만 헤세의 이 문구를 보았다. 본인의 중요한 깨달음인 이 메세지 자체는 읽는 당시에만 해도 나에게 그 다지 큰 울림을 주지 못 했다. 책에 나오는 인물 고빈다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의 모습이 보여지기 전까지는.

 

작 중에 나오는 "고빈다"는 주인공 싯다르타가 그의 인생에서 수 많은 경험들(많은 스승들의 가르침, 사문으로서의 수행 그리고 평소 나뭇잎과 같다고 업신여기던 세속적인 사람들 속에 편입되어 육체적 유희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경험들, 이후 자살을 눈 앞에 두고 각성하여 뱃사공으로서 강(대자연)의 가르침을 받는 경험,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입장이 됨으로써 인생의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경험까지)을 하면서 마침내 진리 즉 "완전함"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의 친구 고빈다는 "완전함"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 했다.

고타마의 평생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존 부처 "고타마"의 설정은 말 그대로 불교 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온전한 깨우침"의 상태에 이른 존재인데,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브라만(인도의 계층 사회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뜻하며, 현인, 지혜있는 자들, 신을 모시는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매우 높은 집안 배경과 환경이라는 뜻) 출신으로 본인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출가를 선택한다. 사문이 되어 고행을 통해 자아를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유체이탈을 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는 일시적으로 자아에서 빠져나와 잠시동안 시간과 자아라는 속박 속에서 벗어나는 수준이으로, 완벽하게 자아를 지우는 방법 즉 "진리"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갈증을 느끼며 또 다시 새로운 스승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 위해 길을 떠난다. 평생 갈증을 느꼈던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완전함을 이룬 자 "고타마"를 만나고, 여기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 고타마의 설법을 듣고, 행동들을 보면서 그가 진정으로 본인들이 찾아 헤메던 "깨우친자, 완전함을 이룬자"임을 인정하게 되지만, 싯다르타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우침은 (작중에서는 이것을 단일성, 시간이라는 차원을 뛰어 넘은 모든 물질들에 대해 본질에 대한 깨우침과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고타마의 제자가 되는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고빈다는 완전한 자, 세존 부처 그 자체인 고타마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듣는 방법을 선택하는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기 보다는, 스승(내가 아닌 다른 이)을 통해 목표에 도달하려는 이런 수동적인 자세에서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무엇이든 새롭게 접하는 분야와 일들에 대해 항상 가르침을 줄 사람을 찾아 헤맸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지식"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혜"의 개념이기도 했다.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면 배우고 싶은 분야에서의 지식 뿐만이 아닌, 그들의 삶의 자세와 태도 나아가 가치관까지 전부 따라하고 싶어했다.

작 중에서, 고빈다가 싯다르타라는 벗이자 스승이자 친구와 뭐든지 "함께" 하면서 그를 통하여 배우려고 하였는데, 이 모습속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고, 지난날들을 회고해보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와 항상 함께하고자 하는 성향과 생각이 강한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나는 매 순간 내가 관심있어 하는 관심사를 공유하는 그룹 속에서 나에게 해당 분야에 대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나의 태도는 배움에 있어 소심했다. 늘 스스로 먹이를 찾기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기 보다 누군가가, 스승이 나에게 떠먹여주기를 그저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귀찮아서, 비 효율적이라서, 시간이 많이 들어서, 직접 찾아보고 배우는 것 보다 누군가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등등 끊임없이 스스로 여러가지 이유를 만들어내면서 합리화했던 것 같다. 이는 배움이 주는 즐거움과 가치가 주는 중요성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굉장히 모순되는 자세와 태도를 취했던 것 이다.

배울점 있는 사람들에게 배움을 추구하고, 그들 곁에서 무엇이든 배우려고 하는 자세 물론 지향할만한 자세이다. 다만, 가르침을 주는 이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배우기 위해 수동적인 자세로 그저 시키는 것만 하는것이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질문하며 스승을 귀찮게 하는 것이 배움에 있어서 훨씬 효율적이고, 제자의 자세로서도 훨씬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또한,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라고 하여 반드시 스승만큼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으로 디테일한 삶의 방식들까지 그들과 똑같이 따라한다고 해서 그들이 성취한 만큼의 성과나 아웃풋이 나에게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 환경, 기술, 자원, 성향 심지어는 성격 조차도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본인이 목표로 설정한 이의(스승의) 아웃풋만큼을 도출해내려면, 그 비슷한 수준에 다다르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가 되새김질 되기 시작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에 비해 통찰력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감히 누가 그의 삶에 있어서 함부로 폄하할 수 없을만큼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깨달음을 얻기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짜놓은 자신만의 편견과 프레임, 남을 평가하는 기준들에 갇혀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를 대면하고 이야기 하기 전까지 궁극적인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다.

"진리"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

지식은 말을 통해 가르침을 통해 전달될 수 있지만, 지혜와 진리는 가르쳐 줄 수 없고, 가르침 받을 수도 없다는 것.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저마다의 다양한 방법들로 도달할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지만, 대 전제가 반드시 "스스로" 깨닫고 도달해야 한다는 점.

나는 이 부분에서 문득 일본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강연가, 호스트 출신인 로랜드의 강연 내용이 떠올랐다.

"스스로 성공하기 위한 방법은 제발 스스로 찾아내세요. 성공한 이들의 강연이나 메시지에 기대어, 동기 부여와 자기 계발의 함정에 빠져서 순간뿐인 감정에 중독되어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백날 강연을 쫓아다니고, 강연 내용을 곧이 곧대로 다 메모하고 외우는 사람들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좋은 스승을 두는 것, 주변 환경을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이루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포인트이다. 실제로 사람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만, 매주 주말 성공한 이들의 강연에 참석해서 그들의 강연들을 단순히 "듣는" 행위 만으로는, 강연 내용이나 '그들만의 성공을 이룬 방법'들과 같은 저마다의 디테일함을 그저 메모하고 암기하는 것 만으로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훌륭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분야의 인사이트, 좋은 슬로건과 메시지, 지식들, 삶의 태도에 대한 디테일한 방법론적 내용들, 모닝 루틴 등등 새롭게 얻은 좋은 지식들을 자신에 삶에 적용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것, 실행에 옮기는 것, 직접 부딫혀 가는것, 몸소 경험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이런 과정 가운데에서 헤르만 헤세가 주장하는 "진리"를 (나는 이것을 "저마다의 진리"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인생에서 만큼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의 목적을 향한 삶의 길에서 앞서 말한 행동들을 실천하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진리"를 깨닫고 배워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고 깨달아야만,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노력하고 실천해야만 그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과 힘 그리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

나는 여기서 "지식"과 "지혜"를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해보고자 조금 더 깊이 생각보았는데, 지식은 하나의 theory 즉 이론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말과 글을 통해 전달될 수 있으며 통상적인 개념, 사상과 같은 부분이고, 지혜는 그 지식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환경과 삶에 적용시켜 몸소 실천해보는 과정 가운데에서 깨달은 "저마다의 진리"라고 결론지었다.

이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1000명의 팬 개념'을 예시로 들어보자. "지식"은 타이탄의 도구들, 럭키 드로우 등등 수 많은 책들에 등장하는 "이론"이자 "개념"이다. 이 개념을 활용해 많은 사업가들, 연예인들, 인플루언서들, 강연가들, 유투버 등등 다른 이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자신의 열성적인 팬ㅊ층을 만들었고, 팬들을 통해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링을 이루어냈다. 하나의 개념이자 사업화 전략이기도 한 이 "1000명의 팬 개념"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구체화 시키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유투브 구독 시스템, 인스타 팔로워 수를 활용한 직 / 간접 광고 등 통상적인 방법이 존재하는가 하면, 일본의 사업가 '니시노아 키히로'는 독자적인 플랫폼인 그의 블로그를 통해서 월 구독료를 직접 받는 형식으로 구체화 시켰다. 또한 아직 유투브를 포함한 온라인 플랫폼이 활성화 되기 전인 1900년대에 활동하던 수 많은 인기 가수들은 그 당시에 존재하는 방법들(앨범 cd, 콘서트, 브랜드 설립 등)로 이 개념을 적용시켜 다양한 구체화된 모델들로 사업을 실현시켰다. 그럼 이 개념을 직 / 간접적으로 활용한 경험들을 통해 실현자들은 모두 같은 지혜를 얻었을까? 나는 지혜가, 저마다의 진리가 여기서 차이점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모두 같은 이론과 개념을 구체화 시켜서 비즈니스 모델링을 하고, 이를 통해 돈을 벌었지만 그들은 각각 저마다의 분야에서 자신들만의 경험과 배경을 바탕으로 때론 기존 모델과 유사하게, 때론 창의적인 저마다의 방식들로 이 개념을 구체화 시키고 각자의 사업에 적용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얻은 "깨달음"에 대한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이후 방향성과 발자취를 살펴보면 그들 중 각자의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활용해서 나아갔다는 점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럭키 드로우의 저자 "드로앤드류"는 타겟 고객층을 팬으로서 하나의 프레임을 씌우고, 이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적극 활용해 그들이 더 관심가질만한 스토리와 컨텐츠 메이킹에 집중했고, 니시노아 키히로는 더욱 더 자신만의 생각, 사업화 전략, 트렌드에 대한 자신의 관점들을 그의 구독자들에게 말하는 점에 집중했다. 누군가는 본인의 그릇에 넘치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관심과 사랑을 받아 초심을 잃고 방황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는 이런 "방황"을 통해 다시 중요한 "지혜"와 "저마다의 진리"를 깨우치고 성공적인 복귀와 이전보다 더욱 눈부신 가치들을 창출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리해보자면, "지식"은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강의를 시청하는 것을 통해, 강연을 듣는 것을 통해 배울 수 있고, 학습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저마다의 진리"는 "스스로" 어떤 경험과 실천을 통해 몸소 체득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지식"은 개념이자 이론적 부분, 좀 더 통상적인 내용들을 추려서 추상화시킨 개념이라면, 이 지식을 각자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방법"이 "지혜"이다. 어떻게 내가 새롭게 배운 지식을 활용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실천하는 과정 가운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저마다의 진리"이자 "지혜"이다.

같은 강연을 듣고, 유투브 영상을 보고, 책을 읽어도 모두에게 똑같은 가치를 부여해주지 않는다. 위대한 스승을 둔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스승만큼 위대해질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스승과 같은 경지에 이르고, 누군가는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된다. 작중에 나온 세존 부처인 "고타마" 그에게는 수만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그중 누구도 스승과 같은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르지 못 했다. 고빈다와 아주 대조되는 인물로서 등장하는 바주데바는 "고타마"와 같은 위대한 스승을 두지도, 싯다르타와 같이 뛰어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나 위대한 현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다. 그저 강에 살면서, 뱃사공으로서 강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강이라는 상징적인 스승을 통해 시간과 자아를 초월한 개념인 단일성을 깨닫게 되었고, 고타마와 같은 완전함을 이룬 경지에 다다른다.

훌륭한 메세지, 뛰어난 가르침.. 그 안에 담겨있는 이론인 지식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시켜서 활용할 것인가, 이것으로 내가 어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것인가, 그 아웃풋의 크기와 퀄리티는 사람마다 역량, 환경, 배경 나아가 운적인 요소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이루어내려고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서 저마다 느끼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와 저마다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말, 글 등을 포함한 "가르침" 통해서는 왜 "지혜"의 전달이 불가능할까??

앞서 지식과 지혜의 정의에 대해 다뤄보았다면, 이번에는 헤르만 헤세가 주장했던 "가르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이 부분은 작의 후반부에 고빈다와 싯다르타의 대화를 통해 헤르만 헤세의 비교적 직관적인 의견을 엿볼 수 있는데, '진리는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이씌울 수가 있다.' 나는 이 부분을 물리적 차원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예시로 해석해보았다.

2차원에만 사는 개미는 3차원에 사는 개구리가 점프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순간이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밖에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 마치 3차원의 정육면체를 2차원이라는 제약을 가지고 표현하려면 정사각형으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인지시켜주었더니, 저마다 자기가 만지고 느낀 부분들에 대해서만 이해하고 각각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싸웠다는 유명한 일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인데,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경험에 투영해서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은 말과 글 등의 형태로서 전달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프레임"이다. 이건 심리학, 뇌 과학적 관점이기도 한데, 사람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편향적이다. 같은 자료와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빈번한데, 확증 편향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클루지적(심리적 오류) 문제들로 인해 정보를 100% 객관적 상태로 받아들일 수 없다. 최대한 객관성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화된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지만, 그 지혜와 진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와 100% 같은 삶의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지혜"와 "깨달음"은 다른이에게 전달되는 순간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지식은 보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자 이론이기 때문에 배움으로써 학습이 가능하다)

글을 마치며..

글로서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책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내용이 아주 명확했기 때문에 정리가 수월할 줄 알았으나, 정리하면서도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이 피어났다.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끄적이려고 생각했던 내용들보다는 양이 많아졌다. 나 역시도 이 책에서의 메시지를 그 자체로만 단순하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다가, 구체적으로 정의해보고 삶에 투영시켜보고 적용시켜보면서 더욱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식이란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일 수록 활용성이 무궁무진하며, 수준이 높다. 이런 본질에 닿아있는 지식은 많이 알면 알수록 나의 스키마가 높아지고 시야가 넓어지며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인사이트가 커진다. 사용성도 높으며, 추상적 이론들을 잘 다듬어서 나만의 도구로서 무기로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은 이 책을 읽고서 더욱 더 뚜렷해졌다.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가 단순히 "덧 없는 지식을 추구하지 말고, 다른 이에게 배움을 추구하지 말고 오롯이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해라"라는 단편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지혜와 진리가 지식보다 더 가치있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지혜 > 지식 = 지식이 쓸모없다"? x) 이 공식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식들을 하나의 도구로서 수집하는 자세의 본질적인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지혜와 저마다의 진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여러형태의 경험들과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반드시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스승을 추구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만 내가 성장과정에서 저지른 오류처럼, 편향적으로 혼자만의 편견을 가지고 스승들을 대하지 말라는 것, 스승의 삶의 방식까지 모든 것을 똑같이 따라하고 흡수한다는 자세보다는 배움을 얻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스승을 대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 그럼에도 세상에 불필요한 경험과 과정은 하나도 없었다는것. 이런 오류와 과오들을 통해서 나의 삶을 싯다르타와 그의 친구 고빈다를 통해서 비추어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앞으로도 보다 다양한 지식들을 독서와 여러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통해 배워나갈 것 이고, 축적된 지식과 기술들을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해서 목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 이다. 이 과정속에서 나만의 진리와 지혜를 쌓을 것이고, 내가 믿는 믿음에 기반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 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하나의 문학 작품을 통해 내게 본질에 가까운 생각을 던져주고, 나로 하여금 깊이 있는 생각과 고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해준 헤르만 헤세에게 감사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배움이 존재한다. "몸소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와 다른 이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지식". 스스로만이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통상적 개념인 "지식"보다는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도구로서 "지식"의 필요성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매순간 다채로운 경험들로 삶을 가득 채우고자 노력하는 자세를 지향해야한다."

profile
RM_young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