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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솔·2024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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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잇 - HTML 핵심 개념 (페이지 안에서 이동하기)

프래그먼트

프래그먼트는 리소스 자체의 다른 부분을 가르키는 앵커이다.
앵커는 리소스 내에서 북마크의 한 종류를 나타내며, 브라우저에게 '북마크 된' 지점에 위치한 컨텐츠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을 나타낸다. HTML 문서 상에서 브라우저는 앵커가 정의된 시점으로 스크롤 된다.

프래그먼트 사용 시 a 태그의 href에 #id 값을 적는다. (class 는 불가하다.)

예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charset="utf-8">
  <title>한국 영화</title>
</head>
<body>
  <a href="#1950s">역사 1950년대</a>
  <a href="#1960s">역사 1960년대</a>
  <a href="#1970_1980s">역사 1970 ~ 1980년대</a>
  
  <h2 id="1950s">1950년대</h2>
  <div>
    <p>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마자 영화인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다시금 재기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광복 직후인 1946년과 1947년의 영화는 광복의 감격을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한동안 동면기에 있었던 영화인들이 서서히 일어나 또다시 영화예술을 꽃피우게 되었다. 1946년에 최인규가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립하고 《자유만세》를 만들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뒤를 이어 이구영의 《안중근 사기》 , 윤봉춘의 《윤봉길 의사》, 전창근의 《해방된 내고향》,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 《3·1혁명기》·《해방된 내 고향》, 김소동의 《모란등기(牡丹燈記)》 등이 발표되었다. 그 뒤 1947년에 윤봉춘의 《유관순》, 신경균의 《새로운 맹세》, 최인규의 《죄없는 죄인》, 이규환의 《갈매기》가 나왔는데, 특히 《새로운 맹세》에서 최은희가 데뷔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한형모가 《성벽을 뚫고》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그 예술적인 면에서 크게 진전을 본 것은 1960년 이후의 일이었다. 초창기로부터 해방 당시까지 그 의욕은 왕성했지만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아직도 미숙했었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영화인들은 민족의 고뇌와 분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영화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 예가 오히려 많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5]
    </p>
    <p>
      1950년 6·25전쟁기에 영화인들은 다시 한번 시련기에 처했지만, 각자 역경 속에서도 1952년 전창근은 《낙동강》을, 이만흥은 《애정산맥》을 발표했고, 같은 해 최인규 문하생이던 신상옥이 《악야(惡夜)》로, 정창화가 《최후의 유혹》으로 각각 등장했다. 1954년 수도로 돌아온 영화인들은 외국 영화의 홍수라는 새로운 도전 속에서도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었다. 1954년 김성민의 《북위 41도》, 윤봉춘의 《고향의 노래》, 홍성기의 《출격명령》, 신상옥의 《코리아》 등이 나왔다. 이 해의 ‘영화평론가협회상(永畵評論家協會賞)’과, 한국영화 초창기의 공로자인 이금룡을 추모하는 뜻에서 ‘금룡상(金龍賞)’이 제정되어 영화계에 활기를 주었고, 이강천의 《피아골》에서 김진규가 데뷔하기도 했다. 1955년 5월에는 전 영화인과 관객들의 여망에 따라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조치가 취해져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해 개봉된 이규환의 《춘향전》은 당시 개봉관에서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1957년에는 최신 영화 기재를 도입한 안양촬영소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6]
    </p>
  
  </div>
  
  <h2 id="1960s">1960년대</h2>
  <div>
    <p>중흥기는 편의상 한국영화의 시기를 3등분하여 제작편수를 비교해 본다면, 1919년 ~ 1945년의 초창기에 제작된 영화편수가 166편, 1946년 ~ 1953년 과도기에 제작된 영화수가 86편, 1954년 ~ 1970년 중흥기에 제작된 영화수가 2,021편이나 된다. 다시 말하면, 1955년 이후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최신 영화 기재의 도입, 그리고 관객의 절대적인 호응이 영화인들을 크게 고무한 결과가 되어, 1954년 이래 영화 중흥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6]</p>
    <p>그러나, 그와 같은 영화 산업의 전성시기도 1968년부터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전파 매체의 강력한 도전, 그리고 이른바 대중오락의 다극화시대를 맞이하여 소위 영화예술만이 대중들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던 시대가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한국영화계는 일제말의 수난기, 6·25의 진통기를 거쳐, 제3의 시련인 불황기에 접어든 것이다. 물론 1960년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일종의 대유행을 형성했었던 청춘영화라든가 문예영화(文藝映畵)라는 새로운 장르의 영화들이 등장, 한때나마 활기를 띠었던 것도 인정할 수는 있다. 특히 신성일은 이 무렵 《맨발의 청춘》, 《청춘교실》, 《흑맥》 등의 영화를 통하여 한국적인 의미의 스타시스템을 구축했으며, 문예영화(文藝映畵)쪽에서는 1961년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유현목의 《오발탄》, 1965년 김수용의 《갯마을》, 1966년 이만희의 《만추》, 1969년 최하원의 《독짓는 늙은이》 같은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와 한국 영화의 질을 높여주기도 했다.[6]</p>
  </div>
  
  <h2 id="1970_1980s">1970년대</h2>
  <div>
    <p>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참담한 불황의 벽에 부딪쳐 허덕이다가, 1974년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1977년 김호선의 《겨울여자》로 차츰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기업은 영세하고 시장은 협소하여 외화와 같이 영화제작에 충분한 시간과 경비를 투입할 수 없었고, 또한 자본주인 흥행사의 간섭 등으로 의욕있는 작품을 제작되기에는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영화산업의 보호 육성책으로 1971년 2월에 영화진흥조합을 발족시켜 방화제작비 융자, 시나리오 창작금 지원, 영화인 복지사업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p>
    <p>198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 산업의 성장에 의해 영화가 지녔던 대중 오락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어 영화산업이 사양화하고 있었지만 1986년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자유화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9년 제작된 방화는 19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106편에 달했다. 실제로 1989년은 방화가 물량면에서는 1980년대 들어 최다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외화직배문제로 외화수입물량이 폭증하여 방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관객의 방화외면, 외화의 선호현상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화는 방화보다도 많은 관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한국 영화계의 불황은 텔레비전 보급과 레저산업의 성장이라는 외적인 면보다는 내적인 면에 더 큰 원인이 있었고, 사회적·경제적·기술적인 제반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출발이 한국 영화를 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하고 소규모의 기업에 머물게 하였다.[7]</p>
    <p>1988년 UIP에서 직접 배급을 맡은 미국 영화 <위험한 정사>의 국내 첫 상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영화계는 한국영화 거듭나기를 위한 한국영화법 개정을 비롯하여 UIP의 직배저지 투쟁을 전개해 전체 영화인을 심기일전시켰다. 그러나 일부 영화인의 사욕은 내분을 자초해 영화인의 치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 결과, 한국영화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 틈을 타서 미국 직배영화는 전국의 영화관을 장악했다. 서울시네마타운의 <사랑과 영혼>은 사대문 안에 위치한 개봉관에 첫 입성한 직배영화로, 한국영화인들은 국내영화산업은 종말이 왔다고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경고했다.</p>
  </div>
</body>
</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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