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회고

박기완·2022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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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은 여러 모습이 필요했던 해였다. 만 4년 경력의 직장인이었다가 대학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복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회사를 구하는 취준생이기도 했다. 한편, 10개월에 걸쳐 천천히 크로스핏터가 되었고 위스키를 마시는 술꾼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했고 기억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복학생이다 보니 휴학 이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다. 밥은 뭘 먹었고, 과제와 공부는 어떻게 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었는지 지금의 나와 비교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을 알만한 자료가 남아있는 게 없었다. 올해의 기억은 지금 가장 선명하지만, 이 또한 휴학 이전의 내 삶처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어 내가 2022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도록 회고를 작성한다.

올 한 해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은 복학생이었다. 학부 졸업 이후 대학원에 갈 것도 아니고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며 쌓은 경력으로 취직할 예정인 나는 높은 학점이 필요하지 않았다. 졸업만 하면 되는 복학생. 그게 나의 목표였다. 하지만 힘을 빼고 학기를 보낸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과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냐 하면 그렇진 않지만, 사실 나는 어떤 일에도 그 정도 노력하진 않는 사람이다. 기왕이면 좋은 학점을 받아서 나의 지성을 인정받고 싶기도 했고, 긴 시간을 쏟는 만큼 많은 것을 얻고 싶기도 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즐겁게 두 학기를 다녔다.

두 학기 동안 전공과목으로 OS와 동시성 프로그래밍, 요구공학, 데이터베이스 개론, 그래프 기계학습 및 마이닝 수업을 들었다. 먼저 OS는 전산의 꽃이라고 하는 만큼 멋지고 흥미로운 개념을 다룰 수 있었다. 핀토스 프로젝트도 큰 규모의 프로그램 구조를 파악하고 기능을 추가하는 경험이어서 유익했다. 여기서 동시성의 개념을 처음 다뤘고, 이후 동시성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좀 더 깊은 개념을 공부했다. 지금까지 프론트엔드에서 동시성을 다룰 일이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동시성을 다루는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Rust와 친해질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요구공학 수업은 요구사항을 잘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사이트를 주었다. 앞으로 계속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런 능력을 기를 텐데 필요하다면 요구공학 수업에서 다룬 방법론을 좀 더 공부해 두는 것도 좋겠다. 데이터베이스 개론 수업은 서비스를 개발한다면 거의 필수인 데이터베이스를 알아보고 싶어서 신청했다. SQL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을 수 있었고, DB를 고도화할 수 있는 방법론인 normalization에 대해 알아두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래프 기계학습 및 마이닝 수업은 기계학습 이론이 개념적으로 이해하긴 쉽지만, 수학적으로 이해하기엔 내 수학 실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렇게 모든 과목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편 교양 과목으로는 과학사와 한국사회경제사, 영미 과학 영화, 한국문학의 이해, 스타트업 101 수업을 들었다. 과학사 수업은 과학도로서 한 번쯤은 공부해야 할 과학의 발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수강 인원 중에 22학번이 몇몇 있었는데 나도 1학년 때 이런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추가로 과학적 사건에서 비롯된 여러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한국사회경제사 수업은 지금까지 배웠던 역사관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역사관을 접할 기회였다. 수업 내내 여러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영향에 대해 설득력 있게 분석하는 방법을 연습했고, 앞으로 사회, 정치적 사건을 내 나름대로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이 태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영미 과학 영화 수업은 평소에 좋아하던 SF 영화를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중간, 기말 에세이 빼고는 학기 중에 해야 할 것이 거의 없어서 영화 썰 듣는 기분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문학의 이해 수업은 평생 읽어 볼 것 같지 않은 근대소설을 거의 매주 한 편씩 읽었다. 학기 끝자락에 와선 정이 들어서 앞으로도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스타트업 101 수업은 창업에 대해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였다. 하지만 리스크가 큰 만큼 혼자 사이드프로젝트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교양 수업들을 들으며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고, 이것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가고 싶었다..

2년간 코로나를 핑계로 운동을 하지 않아 살찐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운동이 필요했다. 4시에 수업이 끝나는 여유로운 일정을 이용해 5시에 크로스핏을 했다. 2월 말에 한 달 정도 먼저 시작했던 형의 추천을 받고 그날 바로 체험하러 갔다. 그날 와드가 파워클린 & 저크 30개였다. 올림픽 역도 경기에서나 보던 동작을 내가 직접 하다니! 그리고 바닥에 바벨을 그냥 떨어뜨릴 수 있다니! 활기차고 재밌는 운동인 것 같아서 바로 등록했다. 아마 크로스핏의 악명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선뜻 등록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잘 모르고 일단 경험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헬스에 비해 크로스핏이 내게 더 잘 맞았다. 활기차고 다양한 운동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헬스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학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크로스핏은 일요 예배에 참석해서 신나는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다. 둘 다 운동을 향한 신앙을 키워주지만, 방향이 조금 다르다. 와드를 하는 동안 모든 생각을 비우고,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지나면 성취감 세례를 받는다. 내년에도 크로스핏은 계속 꾸준히 하고 싶다..

운동으로 채운 신체 건강을 까먹는 취미도 하나 생겼는데 위스키를 마시게 되었다. 올해 초에는 칵테일에 관심이 더 많았는데 점점 위스키로 옮겨왔다. 그리고 지금은 와인에도 조금씩 손을 대고 있다. 이전부터 내가 냄새에 민감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옆자리에 담배 피운 사람이 앉는다던가, 길빵하는 사람을 만날 때… 사실 민감하기보다 좋은 향을 맡을 때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위스키의 다양한 향과 맛을 즐기는 과정이 즐겁다. 편하게 앉아서 잔에서 올라오는 향을 맡으며 향기와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게 만들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아직 내 감각이 날카롭지 못해서 전문가처럼 섬세한 분석을 하진 못하지만, 조금씩 스펙트럼을 넓히면서 맛과 향의 해상도를 올리고 싶다.

과제를 해야 하는 수업이 적어 상대적으로 널널했던 가을학기를 바쁘게 만든 것은 취업 준비였다. 중간고사 이후로 회사 면접을 보러 다닐 생각이었는데 이전에 같이 일했던 분께 지원해보라는 연락이 와서 개강하기도 전에 절차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몇 개 회사를 더 지원했다. 그리고 중간고사 이후에 한 무리의 회사를 더 지원했고 채용 과제, 코딩 테스트와 면접으로 정신없는 10월, 11월을 보냈다. 어떤 주는 월, 화, 수, 목, 금 매일 면접이 있었다. 대면 면접에 참석하러 서울을 올라가는 일도 잦았다. 일정과 해야 할 일을 저글링 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무너지지 않고 잘 해내서 다행이다.

결과적으로 많이 떨어지고 많이 붙었다. 6개 회사에서 오퍼를 받았고 8개 회사에서 떨어졌다. 중간고사 이전에 지원했던 회사는 크고 유명한 회사나 뭔가 기술적으로 있어 보이는 회사였는데 전부 떨어졌다. 기술적으로 배울 점이 많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가고 싶은 회사들이라 더 아쉬웠다. 면접도 못 본 회사는 잘 모르겠지만, 면접 본 크고 유명한 회사들은 정해놓은 기술 질문이 있고 그 기술 질문의 답을 외우고 있는지로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에 좋은 평가를 받고 최종 합격했던 회사의 면접에선 내 경험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었고, 그래서 면접도 재밌었는데 크고 유명한 회사들은 나의 역량보단 내 머리의 용량을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크고 유명한 회사들의 기술 면접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 같다. 시험공부 하듯이 평소에 쓰지 않던 것들을 외워가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떨어진 회사만큼 나를 좋게 봐준 회사도 많아서 행복했다. 그동안 고민했던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느꼈고, 앞으로 내가 하는 생각과 결정들도 큰 가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도 얻었다. 이번에 가게 된 회사에서 즐겁게 일하면서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전 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뢰받는 동료가 되고 싶다. 배울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나누고 싶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보아 다시 내게 돌아오면 좋겠다.

직장인이었다가 학생이었다가 취준생이 된 변화무쌍한 한 해였지만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해서 뿌듯하다. 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내 삶도 새로운 분기점을 지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어엿한 경제활동 인구가 되어 내 삶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 2023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겠고, 나도 아무런 계획이 없지만 아무튼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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