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정도 되는 삶을 돌아봤을 때, 현재 나를 이루고 있는 점 같은 순간들일 존재 하는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을 나열하다 보면 지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몇 가지 순간을 (혹은 기간들을) 정리해 보았다.
요즘은 대학원은 대학교때 어떤한 죄를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때 나는 그러한 대학원생을 동경하고 언젠가 연구자가 되어있는 나를 상상하며 커왔던 적이 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옆자리 친구가 "대학 물리학" (대학교 전공책이었던 것 같다.)책을 펼쳐서 공부하고 있던 게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실험해보는 것 좋아하고 과학, 우주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관심 있었기 때문에 이과에 대한 막연한 재미있는 공부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 친구가 멋있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SF, 과학 소설을 많이 보던 나는 "나"와 세상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이 세상이 어떠한 법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리학을 이해하면 이 세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그 친구와 함께 일반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수업도 잘 못 따라가면서 모르는 단어나 모르는 공식들 찾아가면서 이것저것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공식을 뇌에 비볐던 것 같다) 지적 허영심에 수능과 동떨어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는 맞고) 자발적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경험을 고등학교 때때 하는 것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때 읽었던sf 에서서 과학자들은 인류를 위해 이바지하는 좋은 연구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어떤 큰 목적을 하는 큰사람이었다다. 그런 사람이되고 싶었다다.
그런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4번의 수능을 보았다.
지금은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 생각하고 억지라고도 생각하지만, 그때는 위의 생각이 맞았다. 내가 좋아하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학벌이 좋은 곳으로 가야 그나마 취업이 될 거라는 가스라이팅을 주변에서 많이 했었다. 이 문장은 어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이상한 말이기도 하다. 물리학이라는 학문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학벌이 좋은 곳으로 가야 그나마 취업이 될 거야" 라던지, "미술을 하려면 학벌이 좋은 곳으로 가야 그나마 취업이 될 거야" 어떤 학과라도 다 말이 되는 학벌 가스라이팅이었다. 이러한 가스라이팅을 나 스스로 하였고 그 당시 나는 학벌 욕심이 있다는 내 욕구에 솔직하지 않아서 스스로 "내 꿈을 위해서"라는 말로 다독이고 수능을 계속 도전했다.
기숙학원에서 수능을 준비하면서, 나는 수능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1년 동안 필요한 말, 필요한 영양 섭취 외에 군것질은 모두 사치라고 생각했고,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고 나 혼자서 공부만 했다. 굉장히 외로웠고 괴로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유일하게 나에게 숨을 쉬게 해주는 시간이라면 일과가 끝나고 일기를 쓰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온통 욕밖에 없었다) 나중에 느꼈던 것은 그렇게까지 나를 고립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남들과 이야기하면서, 공부도 하고 서로 동기부여를 주고받으면서 성장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자신의 한계를 넘을 방법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4번의 수능 끝에 나는 항공우주를 전공하는 항공대 기계과에 입학하게 된다. 기계공학과에 들어와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교 때 내가 친구들과 물리학이라고 생각했던 물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공학에서는 물리학 - 4대 역학 이 필수로 필요하니….) 내가 들어가려 했던 물리학과에서는 졸업하고 나서 이러한 이론들을 더 발전시키고 연구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공학은 이론들을 적용하는 엔지니어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공학적 인간이라는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대학원생 로망을 버리지 못했다.
2학년때 관심있었던 전기추력기 (역시 멋있어 보이는 랩실로) 연구실의 교수님께 다짜고짜 찾아가서 학부연구생이 하고싶다면서 지원했다. 그 연구실은 전기추력기를 만들기 위한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하는 랩실이였고 Fortran 이라는 언어를 처음 만져보는 계기가 된다. (대학교육과정 외에 처음 코딩이 이 연구실에서의 코딩이다.)
교수님의 학부연구생이 되었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굉장히 어려운 Particle Simulation 은 굉장히 어려운 분야였고 일단 논문을 읽는 연습도 안되어있는 내가 능숙하게 할 분야는 아니였던 것이였다. 그럼에도 매일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역시 뇌에다가 비볐던 기억이든다.
그렇게 2-3학년을 지내고, 학회도 몇 번 나갔지만 결정적으로 대학원생의 꿈을 접게된 사건이 있는데
한 번은 퇴근길에 같은 연구실의 석사형, 나 그리고 같은 학부 연구생 이렇게 세 명이 퇴근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현재 하는 연구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나 항공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두 분의 열정적인 토론에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에 벙어리가 되어버린 나를 보고 나는 "이 연구 분야에는 내 심장이 뛰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떤 연구라는 것이 이렇게 미지근한 마음으로 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발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때 쯤이였다. 대학원을 그만두면서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어떤 것으로 돈을 벌고 살아야 좀비처럼 살지 않을 수 있지?"라는 고민을 했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들은 모두 눈이 초롱초롱하고 살아있는 열정 덩어리라고 생각했으며 회사에 출퇴근하며 목적 없이 출퇴근하는 회사원들은 좀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왜 대학원생이 되고 싶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생각 없이 회사에 출퇴근하는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아서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공부)로 밥벌이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꼭 대학원생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꿈꿨던 "회사원이 아닌 대학원생"이라는 꿈을 접게 된다. (거창하지도 않지만….)
나는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도 있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오거나 (특히 영미권) 많은 나라를 여행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동경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 악물고 해외로 어떻게 해서든지 나가 보려 했고 못하는 영어를 붙잡고 영어 성적을 만들면서 캐나다 교환학생에 지원하여 붙게 된다.
아, 그 전에 나는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살고 있다. 공항이라는 장소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어디론가 떠나기 전 불안감과 기대감 그리고 분주함이 혼재한 그곳 근처에서 살고 있다. 캐나다 교환학생 가기 전, 휴학하여 공항에서 외국 항공기 실내 청소라는 조금 특별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빠르게 투입되어 쓰레기와 안내 책자 같은 것을 정리하고 기내 편의용품들을 세팅해 주는 알바였다. 가끔 그 업무가 다 끝나면 통로에서 확인서를 받느라 통로에서 비행기로 탑승하는 고객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부러움을 받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이 일했던 아주머니들은 부러움이 아닌 매우 반가운 인사를 하며 응원해 주시기는 했다) 그때의 감정은 뭔가…. 6개월간 알바로 고생했던 나날들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한 해외생활은 어땠던가.
우선,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나가는 것이 재밌었다. 한국에서는 정말 안할 것들도 해보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이야기해보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느낌이였다. 사실, 취업, 돈, 부동산 등의 무겁고 호흡이 긴 골치 아픈 고민들을 안하던 시점이라서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무 고민없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느낌이 좋았다. 특히, 교환학생 과정이 끝나고 미국 동부와 캐나다 퀘백-몬트리올 배낭여행을 약 한달간 다녔는데, 하루 하루 먹을 것과 잠잘 곳 그리고 행복하기위해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감각이 너무 좋았다. 그 때의 경험으로 가끔씩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산다고 생각이 들때면 현재 행복하기 위한 행동들을 하려고 하긴한다.
나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시선 또한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어디를 가든 이방인이라 주목을 받긴 했지만 이방인에게 필요이상의 관심은 다들 없었고 나 또한 남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였다.
꼭 해외살아야 그런 느낌을 받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의 첫 해외생활을 계기로 여러 감각들을 경험해보고 나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현재, 나는 한국에서 2년차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위의 순간에서 개발자가 되기까지 생략된 부분이 조금 많다. HTML을 브라우저에 처음 띄웠던 순간도 있었으며, 부트캠프에서 동료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프로젝트나 스터디를 했던 순간도 있었다. 또 인턴쉽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코딩으로 밥벌어 먹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발을 해야겠다 결심하기 전까지의 내가 살아온 삶을 정리해본 결과 내가 왜 개발자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왜 지금 삶에 만족하는지 너무나도 확실해지는 순간이였다. 내가 걸어왔던 길들이 모두 이 길을 가르키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만들어내고, 창작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나는 웹개발을 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다. 대학원생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것은 생각없이 회사에 출퇴근하는 회사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공부)로 밥벌이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였다. 또한, 이 직업은 해외에서 직업을 잡거나 해외에서 일을 하는데 다른 직종보다 꽤나 열려있는 직종이기 때문에
현재 개발자라는 직업이 종착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또한 나중에 20-30년에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또 다른 이정표이거나 경유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헛된 도전이나 헛된 시도는 없었고 다양한 것을 꿈꾸고 시도해왔었지만 그런 곳에 몰입했던 시간들을 아까워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려서 부터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 글에 빠져서 밤새 읽었던 것은 <해리포터 시리즈> 였다. 물론 여느 어린아이들과 같이 영화를 먼저 접했고 자연스럽게 다음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시리즈를 책으로 읽기 시작했다. 글을 읽어내려나가는 동시에 펼쳐지는 상상력의 세계가 그때의 유튜브였고 넷플릭스였다. 밤낮으로 해리포터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읽기 바빴던, 책 한 장 한 장을 넘길때 설레였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책에 나오는 모든 주문들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해리포터로 SF,판타지 소설에 입덕하면서 우리 집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놀이동산이 아닌 대형 서점을 가야했다. 나는 대형 서점에 들어가면 나를 반겨주는 새 책 냄새가 참 설레고 좋았다. 10살짜리 어린아이였던 나는 서점이 에버랜드인 것 마냥 책을 한 아름 들고 국내소설, 해외소설, SF, 추리 등등 여러 파트들을 휘젓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책을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르러 다녔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과 노는 것 보다 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등하교 시간에 졸린 눈으로 책을 읽으면서 걷다가 전봇대에 부딫히는 학생을 봤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 때의 나는 지금 세계와 다른 세상을 글들로 마주할 수 있는 순간들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시작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 시리즈,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등등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여러 인물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글을 좋아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멋있게 생각하고 동경했다. 그래서 글을 몇 번 끄적이기도 했지만, 글을 쓸 때 내가 감명받았던 멋진 글처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서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최근 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릴때 보다는 나만의 고유한 경험들이 많아지고 공유하고 싶은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글이란 내가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진솔하게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쓸 때 글이 더 자연스럽고 빠르게 써지는 것 같다. 또한, 내가 겪었던 경험들은 미래의 나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도 더욱 단단해지는 걸 느낀다. 글쓰기는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에, 앞으로 글 쓰는 습관을 꾸준히 길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