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은행이 멈추는 날>

백근영·2022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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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있었던 몇 차례의 글로벌 금융 위기들을 살펴보면서 현 금융 제도가 가진 모순점을 지적하고, 앞으로의 금융 위기는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 예측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금융 시장은 복잡계라는 것을 강조하며 파생상품과 레버리지가 판을 치고 있는 지금 systemic risk가 발생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매도 압력이 쇄도할 때 정부와 은행은 필연적으로 자본을 통제할 것이며, 화폐 폭동이 일어날 경우 국가는 계엄령을 선포할 준비까지 되어 있다. 금융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을 수탈해왔다. 미시적 행위자인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노동력과 재산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생존을 위한 동아줄을 잡아볼 것인가?

자본 통제

미국의 CBDC

CBDC는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의 약자로, 말 그대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비트코인과 관련된 맥락에서 이 용어를 접했을텐데, 여기서 말하는 CBDC는 블록체인과는 무관하다. CBDC를 발행하려는 목적은 현금을 없애고 개개인의 통장을 확실하게 통제해 국가의 경제 정책이 가지는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해 디플레이션을 막는 것이 한 가지 예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2022년 1월에 연준이 내놓은 CBDC 보고서에 해당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은행 폐쇄, 시장 폐쇄

금융 위기(혹은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면 금융 회사에는 매도 압력이 쇄도한다. 금융 회사는 기본적으로 레버리지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고객이 한꺼번에 매도 요청을 하면 회사는 그 모든 요청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럴 때면 은행은 ATM 기를 마비시키고 증권 회사는 시장을 폐쇄한다. 정상적인 금융 활동이 불가능해진 국민들은 자기의 재산이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구제 금융

규모가 큰 금융 회사들, 특히 SIFI list에 포함되어 있는 회사들이 파산하게 되면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너무나도 크다. 더군다나 현대의 금융 시장은 글로벌하게 의존성이 형성되어 있어 그 영향이 한 국가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회사들이 파산 위기를 맞으면 국가는 구제 금융을 실시할 수 밖에 없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될 것이고, 그 자금은 혈세를 통해 마련된다.

루스벨트의 금 보유 제한 조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유재산을 몰수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대공황으로부터 국가를 살린다는 명분 하에 시행되었던 조치였고 그 명분에 동의하여 많은 국민들이 동참해주었지만, 국가는 언제든지 대의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의 IMF 사태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다. IMF 시기의 금 모으기 운동은 미국의 경우처럼 법적인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사례

1998년 LTCM 사태와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두 위기 사례 모두 사건이 진행된 맥락은 비슷하다. 특정 사건에 의해 (혹은 특정 사건이 아니더라도 어떤 임계치를 넘어) 고객이 단체로 매도 요청을 하는 시점이 찾아온다. 파생상품과 레버리지로 수익을 유지해오던 금융 회사는 그 많은 매도 요청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 위기를 맞는다. 이 때 회사가 끌어안게 되는 채무는 그 규모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국가는 구제 금융을 제공할 수 밖에 없다. 국가는 세금으로 자금을 만들어 조달하고 금리 인하를 통해 회사의 채무를 경감하는데, 이로 인해 화폐의 신뢰도는 불가피하게 하락하고 회사의 채무를 시민들이 나눠가지게 된다.
영화 <빅 쇼트>를 보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감옥에 간 사람은 딱 한 명 뿐이라고 한다. 은행들은 로비를 통해 규제를 막았고 국민들의 혈세로 다시 일어났다. 레버리지 투자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2번의 금융 위기를 거쳤음에도 금융 기관의 재무제표는 축소되지 않았다. 2016년에는 파생금융상품의 명목 가치가 세계 GDP의 10배 이상에 달하는 100조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2번의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금융 기관들은 금융 위기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배우기보다, 자신들의 부채를 시민에게 떠넘길 수 있는 손실 분담 모형을 구축했을 뿐이다.

세계화폐, 금, 특별인출권

이제 각국의 엘리트들은 현재의 변동환율제가 모순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트리핀 딜레마를 가지지 않는 새로운 준비통화가 필요하다. 그 후보 중 하나가 바로 IMF에서 발행하는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SDR)이다.
SDR은 브레튼우즈 협정 당시 기각되었던 케인즈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SDR은 IMF 가맹국이 국제 수지 악화 때 담보 없이 필요한 만큼의 외화를 인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통화를 뜻한다. SDR은 5년에 한 번씩 표준 바스켓 방식에 따라 그 가치를 조정한다. SDR 통화 바스켓은 달러, 유로, 파운드, 엔, 위안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국 통화가 SDR 가치에 반영되는 비율은 해당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에 크게 좌우된다.

SDR은 특정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가 아니기 때문에 트리핀 딜레마를 갖지 않는다고는 해도, SDR을 기축으로 한 화폐 시스템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통화 바스켓 중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이 40퍼센트 이상이고, IMF가 완전히 선한 의도를 갖고 중립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다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금이 가진 역사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은 역사상 유일했던 세계화폐였고, 통화 바스켓 등을 통해 앞으로도 화폐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힘을 가지고 있다. 달러 패권이 결국 정말로 무너진다면 모든 국가가 금을 확보하려 나설 것이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파시즘

내가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중앙화된 인격적 시스템은 타락할 수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움직이는 사람이어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까지 숭고함을 지킬 수 있을까? 지금까지 금융 엘리트들은 그러지 못했다. 금융 위기가 닥칠 때마다 대형은행들은 자신들의 부채를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떠넘겼다.
자본주의가 결국 사회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슘페터의 주장은 이러한 내 생각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 중 마지막 단계는 정부의 자본 통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슘페터는 엘리트의 기획이 관행으로 뿌리내리고 기업과 정부가 유착되면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결합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보아도 군사화된 경찰이 존재하고, 중산층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기며 근로자 계층에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루즈벨트 시기에는 금의 보유를 금지하는 등,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추가로 떠오르는 생각

거시적 행위자와 미시적 행위자

"엘리트들이 정말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엘리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해도 그들은 거시적 행위자이다. 개개인의 사정보다는 국가와 세계의 존속을 더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미시적 행위자인 우리는 그들과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나의 행동이 세계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은 사치라는 말이다. 우리는 엘리트들이 세상에 가져오는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계속 고민해야 하고, 대의명분 앞에 힘없이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살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비트코인

미시적 행위자인 우리에게 비트코인은 다가오는 금융 통제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하나의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다.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되어있기 때문에 국가가 네트워크를 쉽게 장악할 수 없고 은행이 관여하지 않는 P2P 거래가 가능하다. 그래서 비트코인은 다가오는 금융 통제 시대에 시민들이 부를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현 금융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비트코인에 대한 51% 공격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트리핀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화폐의 후보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암호 화폐이기도 하다. 하지만 통화 정책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으로 인해 비트코인은 어쨌거나 항상 정부 규제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비트코인에 대해 앞으로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그리고 앞으로의 화폐 질서에 어떤 개혁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생각을 정립하지는 못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관련 소식들을 모니터링하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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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github.com/BaekGeu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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