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스 찾아볼게요" - 창작 활동은 생각보다 빨리 대체될지도 모른다.

Broccolism·2023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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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친 생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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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완전한 無에서 시작하는 건 없거든.

그동안 블로그에 책 내용 정리, 번역, 개발기 등 주관적인 생각이 최대한 덜 들어가는 종류의 글을 썼다.
이제는 조금 다른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그림 그리는 AI 인공지능이 화두에 오르기 시작한 지 오래다. 2022년에는 AI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 미술 박람회에서 1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미드저니를 사용한 제이슨 앨런"이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라는 작품이다. 미드저니는 사용자가 입력한 값을 input, 그림을 output으로 하는 인공지능이다.

'추상화'라는 분야가 따로 있는 이유

미술 학원에 처음 가면 소묘부터 배운다. '미술 학원' 하면 딱 떠오르는 석고상을 연필로 그린 그림이 바로 소묘 작품이다. 그리는 대상에 따라 정물 소묘, 인물 소묘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인물 수채화, 정물 수채화 같은 수채화나 기초디자인 등 세분된 입시 미술 과목으로 넘어간다. 입시 미술 학원이 아니라면 보통 풍경화, 정물화 등 특정 대상이나 다른 그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어떤 수업이든 공통점은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그린다는 점이다.

미술의 역사는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산을 기원하는 비너스상,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동굴 벽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의 모양을 본뜬 작품이다. 중세 시대의 서양 미술에서 표현하는 신과 악마의 모습도 결국 얼굴과 몸, 팔다리가 있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만화 등은 모두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그려낸다.

미술 활동은 완전한 無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대상 없이 오로지 점, 선, 면, 색으로 표현하는 추상화는 19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그 전까지의 미술은 모두 특정 대상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창의적이라고 표현되는 미술 분야가 생각보다 덜 창의적일 수도 있다. 혹은, 창의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존의 것을 잘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이 제일 잘하는 것은 학습이다.

흔히 말하는 AI는 데이터 처리 기법으로부터 시작한다. 머신 러닝이든 딥러닝이든,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알고리즘이 나뉜다. 딥러닝의 경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 인간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초기 데이터셋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학습한 다음에야 새로운 input을 받아 새로운 output을 만들 수 있다.

앞에서 갑자기 미술의 역사 이야기를 한 건 미술 활동과 인공지능의 동작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무언가를 input으로 하여 새로운 output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존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존재하는 게 있고 그걸 모방하든 학습하든 잘 써먹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것도 꽤 잘 그린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컴퓨터 입장에서 보는 그림은 결국 RGB 값의 연속,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다. 이 데이터 덩어리를 어떻게 사람이 작품으로 인식하도록 잘 배열해서 그림을 그리는지는 아직 모른다. 어째서인지 우리가 그림이라고 부르는 input을 잔뜩 학습시키면 output으로도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몇몇 설정값을 잘 조절해서 원하는 output을 얻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

미래를 점치는 게 이 글의 목표는 아니지만...

이 글에서 인공지능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를 점칠 생각은 없다. 인공지능은 못 하고 인간만 해낼 수 있는 무언가를 밝혀낼 생각도 딱히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을 모방하는 어떤 종류의 인공지능이든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동작하는 방식은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겉보기에 같은 일을 하는 인공지능까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인간의 뇌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뇌 동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뇌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인간 뇌의 모든 것을 파헤칠 수 있게 된다면 그 원리 그대로 인공지능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시와 소설을 쓰고, 디자인을 하고, 작곡을 하는 등 육체가 필요 없는 활동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우리의 역할

4년 전에 AI 스타트업 CTO의 강연을 듣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 AI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이걸 계속 활용해도 괜찮을까요?

🎤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시기는 전기의 원리가 밝혀지기 전이었습니다. 전구를 만드는 데 전자기적 힘에 대한 이해까지는 없었던 거죠던거죠.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원리가 밝혀지겠지아직은까지는 이걸 활용하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전구와 전기의 관계에 빗댄 비유가 확 와닿아서 기억에 남는 대답이다. 새로운 도구로 떠오르고 있는 AI를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편리한 도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잘 설명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왠지 로봇이 이상한 광선을 쏘면서 세상을 정복하고, 스마트폰을 해킹하고, 개인을 감시하는 등 (물론 해킹과 감시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막아야 할 일이다) 막연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혹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근거 없는 두려움이나 단편적인 감정 때문에 안전하고 편리한 도구를 활용하지 못하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

인공지능에 대해 너무 좋게 말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인공지능이 안전하고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성을 잡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방향성을 잡아가기 위해서는 컴퓨터 과학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장 나온 그림 그려주는 AI만 해도 저작권 문제, 그림의 모델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한 초상권 침해 등 법률적인 문제가 하나씩 나오고 있다. 기술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윤리적 책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혹은 내가 만드는 기술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적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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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도 적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씁니다. 넓고 얕은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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