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5(목) 회고

김형주·2022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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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는 시간

이렇게 글을 적게 되는게 얼마 만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매번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라는 핑계를 대가며 글을 적는 것은 잠시 미루어두곤 했다. 지금부터 5년전이었나? 군대 전역하고 1년 정도 후이니,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여름 방학에 여느 건축학과 학생들은 열심히 유럽 건축 여행기를 찾아보며 여행 루트를 짜고 있을 때, 나는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에 열심히 부자가 되는 법을 찾아보고 있던 때였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쉽게 돈을 버는 방법, 남들처럼 쿨(?)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철부지 대학생이었다. 당시 학교 커뮤니티 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보고, 처음으로 취직이 아닌 창업이라는 말도 안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했고,
해보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런 사람.

우리는 이렇게 작은 아이디어로 이렇게 상도 많이 받았고,
이만큼 대단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엄청 간단한 설명과 조금은 조잡하게 끼워 맞춰진 카드 이미지에는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이미지를 줄이고, 폰트크기를 바꾸고 조금 촌스러운 폰트는 로보토 같은 깔끔한 폰트로 변경하고.. 원색으로 꾸며진 이미지는 파스텔톤의 정갈한 이미지로 변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사진갤러리에 저장했었다. 그 이후로는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수업만 들어가면 다른 생각만 하며 교수님 이야기는 흘려 들었던 것 같다.(사실 그걸 떠나서 애당초 건축으로부터는 관심이 떠난 후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하루종일 보면서 밤낮없이 사흘을 해당 아이템을 요목조목 뜯어보며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사실 그렇게 긍정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청년 5명에, 하드웨어 프로덕트를 만들어 홈 트레이닝 시장에 들어가겠다. 디자인 아이디어 상품이라 킥 기능만 살리면 정말 작은 시장성은 있어보였지만, 사실 하드웨어 시장바닥에서 살아남기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첨단 기술도 없고, 이미 가진 네이밍 밸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지금 있는 시장의 파이를 쪼개기에도 영향력이 한참 부족해보였다.당시 아이템의 대부분 아이디어는 2015년 6월에 한국 최초 출시한 스마트 워치에서 대부분 대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근데도 하겠다고 뛰어든 건 뭐랄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본인에 대한 실망을 채우려는 얄팍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나 창업하려구!

당시에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한테 게임 매크로마냥 내뱉던 대답이었다. 엊그제까지 꿈인 적도 없었으면서 정말 얄팍하게 내 현재에 대한 변명거리 쯤으로 삼으려고 그랬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건축 디자인을 공부하겠다고, 연 몇천만원이 넘는 유학비를 감당하며 졸업후에 유럽 전문 예술학교를 또 다니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고싶을 만큼 열정이 충분하지 않았다. 학교에 재학중이던 때에 르 꼬르뷔제부터 스티븐 홀, 안도 타다오 같은 유명 거장 건축가를 이야기하며, Fancy한 예술가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도저히 이해도 안될 뿐더러 일단 재미가 없었다. 내가 거장도 아닌데, 거장처럼 행동할 것도 없었고 거장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이래저래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개방감, 위요감, 공간감, 공간과의 관계성

건축을 하다보면 저런 단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데, 사실 와닿지도 않았다. 물론 좋은 공간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면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고 계속 있고 싶어지는 곳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현준 씨같은 사람들이 미디어에 나와, 우리나라의 공간들은 문제가 많다며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 싶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학 포함 7년을 건축분야를 굴러본 내게 남은 것은 글쎄.. 수치를 잘 가늠하는 정도의 감각, 그리고 일반인보다는 조금 나은 스케치 능력. 발표를 자주하다보니 발표 능력 정도가 되시겠다. 어찌됐던 맞지 않는 분야는 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기에 3학년이 되던 5년차에 자퇴를 생각했지만 그것도 쉽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려는 대안도 없이 뛰쳐나가는 건 답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목적있(어보이)는 방황을 시작했다. 남들이 나한테 이렇게 물을 때 이렇게 답했다.

그래서 넌 졸업하고 뭘하려고? 나 창업하려구!

기회는 언제나 찾아온다.

긴 인생도 아니고, 겨우 1회 차에 30년 차쯤 되니까 인생에도 나름대로 운명이나 기회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대부분의 RPG 게임에서는 만렙이 99가 디폴트 값이다. 사람이 보통 최대로 사는 나이가 100살 정도라고 하니, 인생을 압축해서 즐길 수 있게끔 그렇게 레벨링 시스템이 짜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RPG 게임도 레벨 30정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어느정도 시스템에 익숙해지게 된다. 접속하자마자 내가 사냥해야하는 곳이 맵의 어느지점쯤인지 알게 되고, 한번 사냥해야할 때 어떤 스킬셋이 유리한지 알게되고 어떤 방향으로 키워나가야 할지 조금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고수들의 공략을 확인하지 않으면, 내 선택이 최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이런 저런 선택을 하면서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30살쯤 되고 나니, 내가 뭘 해야할지 정도는 감이 잡힌다. 내가 더 공부해야할 것들이 무엇이며 어떤 것들을 공부해야 그 쪽으로 나아갈지 어두운 밤처럼 느껴지고 깜깜해도 무드등이 켜진 것 정도의 밝기의 앞길은 읽어볼 수 있다.

당시에 다양한 기회들이 나를 덮쳐왔다.

나는 연애를 쉬어본 적이 없는데(순전히 내 의견이지만, 연애만큼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당시 여자친구는 처음으로 다른 분야의 사람이었다. 건축학과 특성상 작업 반경을 벗어나는 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당시에 데이팅 앱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초였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컴퓨터 공학과 산업 공학을 복수전공하고 본인 분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하던 친구였다. 우연찮은 계기로 알고리즘 문제를 푸는 것을 보게되었고 나도 관심이 가게 되었다. 내가 건축 분야를 혐오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논리를 감성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논리는 충분한 증거와 원칙을 가지고 결과로의 정당성을 얻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건축의 논리라는 것은 그 증거와 원칙이 디자인의 느낌과 감각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주하게 되었던 프로그래밍은 좀 달랐다. 조금은 수학과 비슷하면서도, 충분한 증거와 원칙이라는 것이 감각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 이상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당시 내 느낌은 그랬다.당시 여자친구가 풀어내는 알고리즘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걸 공부하는 분야가 있다고?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거기에서 온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충격적이고 신선했다. 어쨌든 나는 그런 기회를 받아드리기로 했고, 이윽고 결정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으니까 공부해야겠다.

학점도 내려놓은 인생

결국에는 겉으로는 창업을 외치며, 평소에는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엎드리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책상에서 잠들어본 적 없는 내가.. 이렇게 되버리다니! 나름대로 웃기면서도 정말 즐거운 나날들이었던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창업지원단에서 마련해준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시간이 나면 프로그래밍 책을 읽고, 나름대로 돈을 벌겠다고 시간이 날 땐 과외를 하고, 막상 열심히 다녀야할 대학교에서는 피곤해져서 잠들어버리는.. 신기한 시간들이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이때부터는 학점을 B에만 맞추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당시에 건축 분야로는 절대 안가게 될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결정하겠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 것 같다. 이때부터 조금은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결정하는 것들이 단순히 잘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한번 사는 인생 이것저것 다해보자는 결심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3학년 이후로 학점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1,2학년 때는 나름대로 학점에 A도 많고 4점대도 받아본 나름대로 장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대학생이라는 평가잣대에서 3학년 이후의 모습은 사실 너무 막나가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동기들한테 듣던 얘기로는 쟤 진짜 저러다가 어쩔려고 그러는지? 인생 너무 막산다라는 이야기도 들리기도 했으니 뭐.. 결론적으로 5년 쯤 뒤에 와서 돌아보니, 내 결정을 놀라워하는 사람도 많고 실제로 부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그렇게 틀리지는 않은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삶은 어떤가

사실 이런 글을 몇 년전부터 써내려왔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남는 것은 "사진"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글만큼 생각을 잘 표현하는 매체는 없다. 내가 1살 때부터 만들어온 역사들은 당시의 사진에는 충분히 나와있지만, 내가 했던 생각과 이야기들은 따로 적혀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일기장이 있으면 그 글들을 읽으며 되짚어 가보며 당시의 생각을 회고하기 쉬운데, 지금은 당시의 느낌들을 골똘히 생각해봐야 조금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던 지금은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제작년 말에 졸업을 하며 졸업작품 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는 분야에서 큰 회사에도 가서 다녀봤지만, 지금 인생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스물 다섯에 했던 고민들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중이라 스스로에게도 꽤 대견하기도 하고 나름 굉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와 맞물려 현실적인 이유로 졸업을 생각하게 되어서 창업팀에서도 나오게 되었고, 이 덕분에 널널해진 시간으로 졸업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다. 원래 같으면 7일중 순수 작업시간이 12시간을 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작업물이 시원찮았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미 분야에 대한 정은 다 떨어진 후라 크게 심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졸업 시기에 시간이 많아지게 되서 프로그래밍 공부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는 임베디드 분야를 생각하며 공부했다.) 졸업작품도 코로나와 맞물려 직접 건축모형을 만들지도 않아도 되어서 손재주가 나쁜 나로서는 엄청 큰 메리트를 얻었다. 덕분에 드론이라는 매개체와 연결한 산업클러스터라는 나름 신선한 주제로 작업물을 풀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3년간 바닥을 기었던 내 성적을 보란듯이 비웃으며 총 10학점 수업인 졸업 설계에서 A+라는 학점과 수상이라는 신기록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졸업 이후에 일도 하면서 또 추가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부합하는 회사들에 지원했고, 그 중 가장 가고싶었던 도메인에 입사해서 8개월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는 웹개발 보다는 임베디드 쪽을 생각하며 공부했지만 공부하던 중에 알게된 여러 생각들이 다시 내 마음을 바꿔 웹 백엔드라는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급하게 마무리 지어야할 것 같은데, 오늘은 5월 5일이기때문에 놀러가야한다.
놀고와서 또 시간이 날 때 글을 마무리 지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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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에 관심이 많은 잡학지식사전이자,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주니어 개발자 / 잡학지식에서 벗어나서 전문성을 가진 엔지니어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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