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워크샵 회고 : 시니컬은 쿨하지 않다

59INU·2022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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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년 5월이 1월이다.

무의식중에 생일을 따라가는 건지는 몰라도 봄 꽃이 지고 도로변에 녹음이 져야 매해 일이 벌어지고 사람을 만나고 깨어난다. 그 매년 반복되는 패턴을 감안하더라도 2022년의 -엄밀히 말해 시작은 4월 말부터지만; 5월은 유난했다. 진짜루...

자리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내 제안은 눈 깜짝할 새 없이 튕겨나와 내 품으로 돌아와서, 디자인 / PM / 개발 / QA / Data 등 프로덕 유닛 전체 구성원과, 유관 부서 팀장급이 참여하는 약 30명 규모의 워크샵이 되었고, 1주일 규모의 해커톤으로 이어졌다. 이렇게나 갑자기 부서 단위 워크샵 기획과 진행이라는 거창한 경험이 생겼다.

조직 분위기와 문화에 따라서는 최악의 이벤트가 될 수도 있을법했던 급한 일정과 불친절한 맥락에서 진행된 워크샵은 멋진 동료들의 도움과 호의, 선해로 부족한 설계에도 최악을 면했고 어쩌면 가능했던 가장 멋진 방향으로 진행됐다. 워크샵은 충분히 치밀한 계획과 의도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동료라는 운에 기대어 진행되었으므로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회고가 옳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번 일로 한동안 미뤄뒀던 주제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앞으로 일을 할 때 잊지 말자고 다짐하기 위해 개인적인 감상과 후기를 적는다.

일단 반성

이렇게나 거대하고 거창한 규모와 의미의 일을 추진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머리에 힘 주고 신중해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여간해선 빅마우스가 되기 쉬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 워크샵 이후로 회사에서나 동료들에게서나 의외의 모습을 봐서 놀랐다는 피드백을 많이 들었다. 입사 9, 10개월차. 스스로 생각한 것 보다도 회사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을 했다. 회사 흥망성쇠의 중앙에 직접 발을 딛는 가능성과 감각이 좋아서 스타트업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개발자까지 되었는데 피드백을 보아하니 근래 나는 아주 안전 지대에서 남의 일 보듯 회사를 건너다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이 그럴만한 자리가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은 핑계였던 것이 듣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 할 자리는 언제나 있었다.

문제 의식은 불만이 되거나 일이 된다

나는 내 사회적 감정 에너지의 총량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굳이 사담을 찾아다니지 않고, 회사에서의 소셜링 우선 순위를 높게 두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내가 그렇게 사회 생활 일면을 체념하고 지내도 사회에는 그리고 특히나 우리 회사에는 친절한 이웃들이 끈기있게 호사탐탐 소셜링 초대장을 보내오기 때문에 입사 9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에 내 귀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렸다.

졸업 이후로 논 적은 없다. 싸돌아다니며 여러 직무를 찍먹했다. 한 우물 파지 않고 이 우물 저 우물 직접 빠져보느라 전문가로서의 경력은 만들지 못했지만 여러 조직과 인간 군상을 봤다. 반성도 많았고 반면 교사도 많았고 교훈도 많았다. 소박한 내 경험적 통계에 의하면 사담의 중삼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도 영글지 못한 불만들이 들려온다는 건 위험한 시그널이다. 결론 없는 불만과 모호한 의구심이 조직 내 임계치에 도달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 거대하고 모호한 실타래가 풀리지 않으리라는 무력감이 만연해있는 상태일 때도 있다.

나는 언제나 팀을 좋아하고 팀 플레이를 좋아한다. 그 동안 내게 있어 스타트업에서 떠나는 동료는 졸업이거나 낙오 거의 두 가지 타입이었다. 문제 상황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무력감과 낮은 기대로 이탈하는 동료들이 내일 벌어질 일처럼 눈에 선했고, 나 역시 그 공간을 이탈하거나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거나, 스스로를 위해 그 중 한 가지 시도를 선택해야했다.

문제 의식이 사담에 갇히면 불만에 머물지만 공론장으로 끌어내면 일이 된다. 사담석에서의 불만은 아무도 해결할 의무가 없지만 공론장에 나온 문제 의식은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가 된다. 나는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그 문제들을 공론장으로 끄집어내서 제각기 무력감과 싸우는 대신 모두 소리 내 화를 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시니컬한 것은 쿨하지 않다.

사람을 싫어하는 일에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든다. 이제는 사람을 잘 싫어하지 않는다. 의심과 무력감은 전염된다. 나는 의심과 반문에서 나아가 조그만 결론이라도 도출하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대화를 좋아한다. 나 역시 늘 그런 대화를 하지는 않으므로 경계해야한다. 볼품 없는 에너지량으로 사담을 기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담에는 결론까지 도달해야하는 의무와 긴장감을 요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화 구성원들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할 때 대화에서 어떤 결론 혹은 방향성에 도달하는 것은 대화 이후 제각기 썩어갈 가능성을 막고 대화의 최저 건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혹여 그것이 틀린 답이라도 마침표를 찍을만큼 끝에 닿기 위해 애쓰지 않은 비판은 결국 비판으로 영글지 못하고 불만과 의심에 머물렀다. 배출구 없이 쌓이는 불만과 의심은 무력감이 된다. 글쎄, 내가 본 것들과 경험한 것들은 그랬다고 지금의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는 비꼬기를 좋아하는 못된 취향을 가졌지만 어디까지나 말장난의 기술로만 못다버린 취향일 뿐이고, 나는 시니컬하고싶지 않다. 시니컬함은 쿨하지 않다. 그것은 영글지 못하고 마무리 하지 못하는, 책임지지 못하고 다룰줄 모르는, 어리거나 비겁하고 동시에 유약한 불만이다. 다정은 표층적이고 피상적인 친절과 다르다. 다정은 정신과 육체적 체력에서 나온다. 다정한 사람은 시니컬하지 않다. 다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니컬은 문제를 대면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거쳐가는 사적인 사고의 과정이다.

문제 의식이 사담에 머물면 의심과 불안과 무력감이 된다. 문제가 공론장에 나올 때 그것은 공적인 업무이자 공동의 과제가 된다. 전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지만, 후자는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나는 공론장에서 문제에 대해 말 하는 쪽을 좋아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해결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두고 혼자 음흉하게 미래에 함께 일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주머니에 넣거나 빼는 상상을 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오래 곁에 두기 위해 정을 쏟을 친구들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보통은 그렇다. 우리의 대화를 종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의 대화가 불만에 그치는지, 혹은 그래서-, 그렇지만-, 그러니까-라는 문장으로 의젓하게 나아가는지.

사람은 직접 만나자

집단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직접 대화하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알 때도 있다. 간접 취득한 맥락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를 해석하고 잠정 결론과 기대치를 고정한 채로 첫마디를 나누게 되는 일도 빈번하다. 그러지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간접 취득한 맥락은 당사자의 복합적인 맥락을 모두 전달하지 않는다. 단면적이고 납작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나 하나 뿐이다.
나 자신의 퇴사일을 앞당기고 있는 게 아닐까 아찔했던 워크샵 전후로 가장 감사한 경험은 그 동안 게으르고 나태하게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던 여러 동료들의 선의와 도움을 내리 느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교우건, 연애건, 친구 사귐이건, 사람을 가까이 겪을 때마다 나는 성장했지만 그 경험이 늘 친절하고 다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겪어내는 일 자체는 내게 여전히 가장 서툴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그 장애물이 허물어진다면 분명 이번 일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꿈 꾸는 사람 옆에 서면 함께 꿈을 본다고 말했던 사람이 나였는데, 옆자리 동료가 어떤 멋진 꿈을 꾸는 사람인지 충분히 궁금해하지 않았다니 조금 반성할 필요가 있다.

결론

그곳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있는 것을 전부 해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까 얼렁뚱땅 내 역량 밖이라고 생각했던 경험도 해봤다. 얻은 게 많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앞으로도 문제를 대면할 때는 시니컬한 결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시니컬한 것은 쿨하지 않다. 파도에 젖고서도 다정한 사람이야 말로 쿨한 사람이다.

이게 뭔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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